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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이 책을 읽고 난 후 느꼈던 감정은 좌절감과 우울함, 질투 그런 것이었다. 현직 판사로 일하면서 소설 <미스 함무라비>를 쓴 문유석씨를 보니 문학을 전공하고 소설을 쓰겠다며 매일 노트북을 열고 닫는 내 자신이 상대적으로 작고 게으르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바쁘신 분이 어떻게 시간을 내서 글을 썼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들에 대한 선입견을 깰 수 있었던 것은 수확이다. 솔직히 판사에 대한 선입견은 크게 깰 것이 없다. 처음부터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보통 법정 드라마나 영화를 보더라도 판사들이 하는 역할은 매우 적을 뿐 아니라 대사나 표정도 비슷해서 검사나 변호사만큼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평상시 삶 속에서 진짜 판사를 본 적도 없다. 나에게 판사란, 어려운 공부를 통과한 똑똑한 사람들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재판에서 판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내 삶에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한마디로 판사란 물 같고 공기 같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판사들의 삶에서 동질감과 위로를 얻었다. 책을 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머릿속에 그려진 판사들의 모습은 법복을 입고 재판을 하는 장면이 아니라 늦은 밤까지 높이 쌓여 있는 A4용지를 넘기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거북목이 되도록 기록을 읽고 또 읽는 것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혼자 열심히 무언가를 읽고 쓰는 사람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것이 왜 위로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 기록은 판사 소유의 물건은 아니다. 오히려 ‘판사의 삶을 소유하고 있는 물건’인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로 판사의 삶이란 기록을 보는 삶이다. 판사가 보는 기록은 타인들의 삶, 그중에서도 갈등, 분노, 의심의 장면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도 객관적인 제3자가 아니라 갈등의 당사자 각자가 자기 시각에서 바라본 모습들을. 정말로 ‘기록’된 것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 판사의 삶은 이런 의미의 기록 더미 속에서 진실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가는 일상의 연속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품 역시 기록이다. 136~137쪽
글을 쓰는 사람들의 삶도 판사와 매우 비슷하다. 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쓴다는 것에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들이 겪는 갈등, 분노, 의심, 미움, 눈물 등 삶의 희로애락이 집약적으로 들어있고, 그것을 생각하며 문장과 문장사이에서 고민한다. 그 모습이 매우 흡사해서 놀랐다. 그 기록 안에는 타인들의 문제 뿐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도 들어있고, 그것들이 한데 섞여서 힘들게 할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어떤 기록이든 글이란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닮고 있으니까. 박판사가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정작 판사가 되어 사건 기록을 보는데, 자꾸만 말을 걸어와요. 기록 속의 사람들 이요. ” 193쪽
판사들이 객관적인 사실과 판단을 바탕으로 최대한 정확하게 판결하기 위하여 골무가 닳도록 기록을 본다는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기록된 문장과 문장사이 행간 속에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과 고통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해석과 놓쳐버린 문장 하나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어떤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게 될지 모르니 매일 밤 판사들은 판결에 관련된 수많은 기록을 읽고 또 읽으며 검증해 나갈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법은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 인간 본성의 선한 양심이 발휘되어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당사자끼리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은 계속 발생할 것이고, 그때마다 법원을 찾는 사람들은 넘쳐날 것이다. 법 앞에 서서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고, 때로는 억울한 판결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신중하게 누군가의 기록을 읽고 토의하며 판결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판사들이 다수를 이룰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법조인이든 일반 국민이든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누구라도 억울한 일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민재판에 참여했던 노인의 외침처럼 말이다.
“안 됩니다! 더 합시다! 우리 처음부터 다시 토론합시다!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 아 니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힘 닿는 데까지 토론합시다. 그게 도리 아닙니까.” 360쪽
모든 판사들이 기록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찾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