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그들이 떠나온 나라는 물에 떨어진 잉크방울처럼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P.70

 

   국운은 기울고 있었으나 사람들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치열했다.  약육강식, 힘의 논리를 내세운 군대와 제국주의의 탐욕 앞에 조선은 세상에서 힘없이 사라졌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 외교권은 박탈당했고, 군대는 해산했다. 식민 통치의 시작은 조선인들의 삶을 마음껏 유린했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이 시점에서 시작한다. 나라의 운명만큼 사람들의 앞날도 내내 불안하고 암울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닥쳐 온 삶앞에 나약하지 않았다. 그들이 품어왔던 꿈과 미래, 도덕과 상식, 생활방식과 가치관은 무너졌지만, 새로운 세상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인한 생명력을 키워냈다.

   김이정, 박광수(신부에서 무당으로), 왕족인 이종도와 그의 식솔인 아내 윤씨, 딸 이연수와 아들 이진우, 도둑 최선길과 역관 권용준, 전직 군인 조장윤, 김석철, 서기중, 박수무당, 궁중악사였던 내시, 서울과 궁성을 방비했던 박정훈(나중에 여연수의 남편이 된다.) 이들을 포함한 1032명의 조선인들, 즉 조선 최초의 멕시코 이민자들은 1905515, 멕시코 남부의 항구 살리 나크루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유카타 반도의 관문인 프로그레소항을 거쳐 유카탄 반도의 중심 도시인 메리다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또다시 유카타 반도 전역의 22개 농장으로 1032명의 조선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닥쳐올 힘겨운 삶은 오롯이 그들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한다.

   국가가 무너져도 개인은, 각자의 세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곳에서 자기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부딪치고 깨지면서 성장하고 변해간다. 김영하의 <검은꽃>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던 것은 공동체가 아닌 개인이었다. 우리는 먼저 집단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삶 앞에 서게 된다. 국가는 멸망해도 우리의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소설속에서 인물들의 삶이 자세히 설명되고,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도 그들만의 이름을 부여했던 것도 사람이 나라이고 세상이기 때문이다.

   불운한 조선에서 팔려가다시피 한 멕시코에서 날카로운 선인장 가시에 찔리며 고된 노동을 견디어 내는 가운데 자신만의 꽃을 피웠던 우리의 선조들은 국가가 보호한 사람들이 아닌 개인의 힘으로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해도 낯선 땅에서 노예같은 삶을 살아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국을 원망하기 보다 국가와 상관없이 자기들의 나라를 세워 나갔다. 그렇게 견디고 싸우며 살아냈던 시간들을 후세는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속에는 냉혹하면서도 처절한 인간들의 삶이 이글거리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그들과 같이 고통을 겪고, 버티며 함께 시간을 이겨낸다. 더위와 갈증, 채찍질 속에서 인간임을 지켜내기 위해 싸우는 가운데 검은 꽃은 피어났다. 알 수 없는 세상, 누구나 보호받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은 없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오늘보다 내일에 아주 조금 희망을 걸며 짧은 행복을 맛보는 것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남기길 원한다. 각 자의 방식으로 말이다. 고된 노동과 적응하기 힘들었던 멕시코 농장에서도 자신들의 존재를 지울 수 없었던 김이정과 이연수가 사랑을 나누고 아들을 낳았던 것처럼, 과테말라 띠깔 신전 광장에서 역사상 가장 작은 나라를 세우고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나는 왜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일까? <검은 꽃>을 삼일 만에 다 읽고 감상평을 쓰지 못한 채 한 달 동안 다른 책을 읽지 못했던 것은  몇 줄의 기록이라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보수가 주어지지 않아도, 일요일 밤 책상 앞에 앉아 써지지 않은 글을 붙잡고 멈추지 못했던 것은  나 스스로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재미있게 읽었던 책도 기록해 두지 않으면 머릿속에서만 맴돌다가 잊혀지고 만다. 내가 읽었던 책과 그때 느낌, 생각의 변화는 기록과 함께 구체화되고 기억된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속에서 삶을 이어간다. 그 삶 속에 주어진 보상은 없다. 자신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간 흔적을 남기며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과거 조선의 살았던 1000여명의 사람은 멕시코 땅에다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나는 오늘 또 내 존재에 대해 어떤 것을 남기게 될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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