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기 시작한 9월, 비가 내리고 가을이 시작되었다. 더위를 뚫고 불어오는 찬바람은 항상 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은희경의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는 그 느낌과 닿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던 늦여름 혹은 초가을, 젖은 머리를 날리며 이른 아침 자율학습시간에 맞춰 학교에 갔다. 오전 7시 10분, 교실 창가 자리에 앉아 자습을 하다보면 반소매 위로 드러난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차가우면서도 신선한 찬 공기가 좋았다. 차가운 기운이 주는 미세한 떨림을 시작으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었다. 그때 창 밖 화단에는 여고생 주먹보다 훨씬 큰 연분홍색 장미꽃들이 이슬을 채 떨어내지 못하고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그때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순전히 이 소설 때문이었다.
-안나와 루시아는 모두 남자친구는 없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정말 특별하게 보내야 해. 루시아가 말했다. 스무 살이 되면, 그때부터는 세상에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바쁘고 또 따분하겠지. 어른들은 다 그렇잖아.
p. 13
은희경의 소설은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잊고 있었던 지난날을 떠오르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안나처럼 루시아에 대한 열등감과 좋아하는 요한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나름대로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팠고 가슴 쓰렸지만 그래서 달콤했던 기억, 뒤돌아서서 부끄럽고 초라해서 지워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만큼 진실했고, 순수하게 빛났던 특별한 순간을 찾아내게 만드는 힘이 이 소설에는 있다. 그 힘으로 이 단편소설집을 읽어 나갔다. 그러는 동안 고등학교 시절 너무 평범해서 내 안에 묻혀버리고 만 시간이 되살아났고, 그로 인해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가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교정의 찬 기운과 나만의 세상을 가졌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행복은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우리들 가슴 속에는 각자의 세상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만의 세상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지만, 지상에 내려앉은 단 하나의 눈송이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아무리 어른이 되었어도, 바쁘고 따분한 세상에서도 재미있는 일 하나쯤 가지고 살아가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편 은희경의 소설을 읽는 동안 사람들이 비슷하지만 각자 다르게 자신의 고독을 감당해나가며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프랑스어 초급과정>에서는 서울 중심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고생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살았던 한 여자가 남편을 따라 신도시 K로 이사와 살게 되지만 결코 깊이 뿌리내릴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일상을 버티고 살아나가는 주인공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젊은 아줌마이다. 20여 년간 누려왔던 터전을 벗어나 뿌리내릴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신도시를 향해 떠나가는 주위 친구들과 겹쳐보였다. 저들도 그곳에서 아파트 평수와 아이들의 학군 때문에 진짜 마음을 설레게 할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될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스페인 도둑>의 완과 소영처럼 짧은 시간과 한 순간의 사건을 통해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서로를 향해 달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란, 의외의 지점에서 얽히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은희경의 소설에서 잠시 허무와 인간의 연약함을 보았다. 연약해서 작고 초라했지만,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나름의 방법으로 끌어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 청춘과 중년에 놓여 있는 사람, 죽음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노년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살아내고 있는 한 공간속의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고독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을 원한다.
- 고독한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은 늘 오해한다. 그들은 강하지도 않고 메마르지도 않았으며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해도 사람은 늘 자기만의 고독을 갖고 있다. 우리 모두는 코코슈카의 잠 못 드는 연인처럼 서로를 껴안은 채 각기 푸른 파도의 폭풍우 속을 떠내려간다.
p. 40
나 자신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지금 꽉 껴안고 있는 사람들의 팔을 놓지 말아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강하지도 않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도 고독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만 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아닌 타인이 다른 눈송이와 비슷한 단 하나의 눈송이로서 서로가 세상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존재라는 것을 생가각 한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