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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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새벽, 따뜻한 빛을 닮은 그들

그믐, 또는 당신의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읽고

 

 

  <그믐, 또는 당신의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지 궁금했다. 그리고 제목과 책표지를 보는 순간 20106, 스페인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갔던 이른 새벽 공기와 하늘이 떠올랐다. 한국이었다면 잠들어 있었을 새벽 5, 태양은 떠오르지 않아 캄캄했지만, 어둠 속에서 아기속살처럼 거의 흰빛에 가까운 여린 파란빛이 고요하게 새어 나오고 있는 하늘을 보고 걸음을 멈췄던 기억이 생각났던 것이다. 찬 기운이 살갗에 잔 소름을 일으키고 하얀 목장갑을 낀 손가락 끝을 시리게 하였지만 묘하게 마음을 들뜨게 하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 때 나는 그믐달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다 읽고 나서도 이 작품이 그때의 새벽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서늘하면서도 따뜻했고, 그 속에 있던 사람들은 아름다웠던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면서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새롭게 열린 그 세계는 다시 또 다른 세계를 만든 다음에 사라진다. 이 소설은 하나의 패턴을 만들어 내고 그 것을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전개된다. ‘패턴/시작/표절에서 시작하여 나무/호텔/소원으로 끝을 맺는 15개의 장마다 3개의 단어가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고 있다. 소설을 읽기 전 3개의 단어들로 이루어진 차례를 보면서 마치 우주 공간속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소행성들을 보는 듯 했다. 규칙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세상에서 인간 또한 각자 삶의 패턴을 만들어 내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혹은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 알이 자신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하는 남자 주인공은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괴롭힌 친구를 죽인 뒤 구형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런 그의 뒤를 죽은 친구의 엄마가 집요하게 따라 다닌다. 한편 남자와 고교 동창인, 불행한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나 그저 그런 뻔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여자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세 사람은 서로를 잡아당기는 사랑과 미움, 애증과 집착이라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같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함께 한다.

 

그런데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p. 87

 

  놀림이 질투가 되고, 질투가 미움이 되어 살인을 일으키고 그 살인이 용서가 되었다가 애증이 되면서 멀어질 수도 가까워질 수도 없는 관계가 있다. 서로를 이해 하지만 그 세계를 파괴해야만 끝나는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남자와 아주머니는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세계였다. 한편 살아있는 것이 감사이고 행복인 관계가 있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받고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 여자와 남자의 세계가 그런 곳이었다. 이 세계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곳에 같이 존재한다. 마치 우주 알이 남자의 몸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말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다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세상 속에서 그래도 끝까지 빛을 잃지 않는 것은 사랑이었다. 남자는 자기의 과거를 다 알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옹호해주며, 둘만의 좋았던 고등학교 시절을 기억을 준 여자에게 보험료를 남겨 주었다. 그 돈으로 여자는 자신만의 방을 갖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여자는 죽은 남자를 기억했다. 죽은 아들을 잊지 못했던 아주머니는 그 남자를 죽임으로써 자유로워졌다. 남자는 아주머니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믐이라 그래,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거든. 그래서 쉽게 볼 수 없지.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어. 남자가 말했다. 낮에는 너무 가느다랗고 빛이 희미해서 볼 수가 없어.

                                                                                                                   

                                                                                                                                                         p.140

 

  사람은 새벽녘 짧은 시간에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그믐달과 같은 존재이지만, 분명히 자신의 존재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기억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삶을 이루어 나간다. 즉 자신이 선택한 기억이 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이다. 단어와 단어가 만나 문장이 되고, 하나의 문단이 된 뒤 한 편의 글이 되듯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만나 그들의 세상을 만들고, 또 새로운 세상을 잉태한다. 나 자신이 세상인 동시에 우주인 것이다. 그와 같은 세계가 수없이 존재하는 곳에서 우리는 창조자인 동시에 파괴자가 되어 살아간다. 그들이 그 속에서 만들어 내는 사랑, 미움, 질투/ 살인, 집착, 용서/ 인내, 포용, 희망/ 등의 에너지는 엄청나다. 오늘 우리가 만들어 내는 또다른 3개의 에너지는 무엇일까? 그것에 따라 또 하나의 세계가 창조되거나 파괴되겠지. 만약 인간이 그믐달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전보다 더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새벽녘을 닮은 이 소설이 묻는다.

 

 

너는 누구였어?’

셔틀버스와 버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내내 그 문장을 곱씹었다. 단어들이 순서를 바꾸었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p.152

 

나 또한 궁금해진다. 우리는 이 세상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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