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심장 - 교유서가 소설
이상욱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었다. 첫 페이지에 입이 왼쪽으로 뚫린 물방울 모양의 우주선이 그려져 있었다. 이상욱의 단편집 기린의 심장에 실린 첫 번째 소설 <어느 시인의 죽음>에 나오는 우주인 가브족이 타고 온 우주선이다. 처음에는 뭐 이런 소설이 있나 그랬고 읽으면서 재미있는데 라고 했다가 마지막엔 살짝 마음이 찡했다.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이상욱만의 소설이었다.

 

 

아저씨가 보기에도, 저에겐 미래가 없는 것 같나요?”

 

 

그때, 미래가 있냐고 나에게 물었지? 매일매일 그 질문에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모르겠어. 아마 지금껏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겠지. 그런데 오늘, 나는 난생처음으로 미래라고 할 만한 걸 얻었다. 바로 이 통장이야. 이 숫자가 보이니? 넌 이게 믿어지니?” 33

 

 

  <어느 시인의 죽음>을 읽으며 는 아직도 우리의 미래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모양이 빠진다 해도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 미래를 죽여서 과거를 유지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어른다움이란 무엇일까.

 

 

  과학이 발달하여 육체를 동기화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베타인 와 알파인 고객이 하나로 설정되면 기간이 도래할 때까지 동기화를 멈출 수 없다. <라히이나 눈>의 나오는 성재는 여섯 명의 알파와 동기화 되어 있다가 발목 염좌로 죽었다.

 

 

식혜를 담아주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빠와 삼촌이 왜 싸우는 거냐고.

그림자 때문이지.

그림자 속엔 어두운 마음이 숨어 있거든. …… 저 나이가 되면 누구나 그림자에 쫓기며 사니까. / 저도 그림자에 쫓기게 되나요? / 그렇게 되겠지. / 무서워요. 할머니.

도망치는 방법이 하나 있지. …… 열심히 달리면 된단다. 달리는 동안엔 발에서 그림자가 떨어지거든. 어두운 마음이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발목을 잡지 못한단다. 41

 

 

라히이나 눈(Lahaina Noon)'은 하와이어다.

그림자가 없는 세상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50.p

 

 

  인간의 욕망은 측정 불가능한 빠른 속도로 어디쯤 닿지도 않고 계속 나아가기만 한다. 그 욕망은 멈출 수 없기에 누군가 사라져주어야만 하겠지. 그림자 없는 세상이라니. 그곳을 찾아 떠나려고 했던 성주의 삶이 불안했다. 달리기를 멈추었을 때 그들의 그림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들이 도망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우리 모두 각자의 그림자를 안고 세상을 통과하기를 기원했다. 어둠도 세상의 일부이니까.

 

 

왜 하필 기린의 심장일까? ……

목이 길잖아요. 시야가 넓어서 먼 곳에서 다가오는 위협을 빠르게 인지하죠. 다리도 길어서 작정하고 달리기 시작하면 꽤 빨라요. 그야말로 최적이에요.”

최적이라니?”

뭔가를 숨기기에 기린만한 게 없다는 뜻이죠.” 98

 

 

…… 인간은 절대로, 기린의 심장을 이길 수 없다네. 입으로는 누구나 마음이 소중하다고 말하지. 말로는 뭘 못하겠나. 발가벗겨진 인간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기린의 심장을 구걸하는지 여러 번 봐왔다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 이 계집을 보게. 어머니의 병? 기린의 심장으로 얻으려던 게 고작 그것뿐이었을까? 116

 

 

  경찰관 K는 경찰서에 오게 된 소설가 에게 자신이 겪었던 기린의 심장에 대하여 들려준다. K의 이야기는 딱딱하고 차가운 경찰서에서 환상의 동물원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너무 피곤해서 버스 안에서 잠깐 졸았을 뿐인데 왜 이토록 낯선 세계로 와 수수께끼 같고 괴기스러운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단지 관리인의 요구대로 기린의 심장을 훔치러 온 소녀를 죽여야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동화 속으로 빠져들었다가 다시 환상 속으로 이동하는 느낌이 든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소설을 읽으며 작품속 인물에게도 작가에게도 묻고 또 물었다.

 

 

  나는 <<기린의 심장>>에 실려 있는 아홉 편의 소설이 다 좋았다. 소설은 신기하고 묘하면서도 유머스럽고 괴기했다. 그리고 작은 알맹이 하나 마음에 박히게 만들었다. 소설 속 세상은 작가의 상상력과 노력 속에 새롭게 잘 버무려졌고, 읽는 독자에게도 거부감 없이 다가온다. 소설이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보다 늦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장과 문장이 밀고 나가는 무게와 감동은 무겁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 소설이 주는 힘은 크다. 오랜 시간 일상을 열심히 살면서 밤마다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열심히 글을 썼다는 작가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그가 열심히 써놓았던 소설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날아가 또 다른 세상이 되겠지. 나도 그 세상 중 하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