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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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나의 부모님은 작은 공장을 운영하셨다. 소설 속에서 공상수와 조선생이 찾아다녔던 봉제공장의 모습과 비슷했다. 아버지가 검고 푸른 원단위에 쓱쓱 제단을 한 뒤, 로봇 같은 제단기로 잘라내면 엄마와 3~4명의 직원들이 미싱으로 그것을 드르륵 박아냈다. 그러면 짧은 시간 안에 야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입고 겨울을 날 수 있는 따뜻한 작업복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옷들은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의 가게로 팔려나갔다.


 그는 미싱을 환기할 수 있게 실을 가지고 다녔다. 미싱을 팔자고 미싱에 대해서만 설명한다면 하나 마나 한 영업이었다. 상상할 ‘여지’를 주지 않으니까. 여지는 삶에 있어 숨구멍 같은 것이었다. 상수는 그런 것이 없는 삶을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9.p)


 그래서 공상수가 팔아야 하는 미싱과 차에 가득 실고 다니는 실들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고 그리웠다. 어렸을 때 동생과 실을 감아 두었던 심으로 망원경이나 무전기를 만들어 놀던 추억도 떠올랐다. 소설의 첫 장을 펼쳤을 뿐인데 이제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 아버지가 빠르고 정확하게 제단을 하시던 모습과 라면이나 핫도그, 튀김과 같은 야식을 만들던 지금보다 훨씬 젊은 엄마가 떠오른다. 공장을 스쳐갔던 아주 먼 친척들, 사돈의 팔촌들도 모두 잘 살고 있겠지. 내용이나 등장인물과는 상관없이 미싱과 실만으로도 이 작품은 내 마음속에 그렇게 들어와 버렸다. 


 소설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말해 주는 장르이다. 한 편의 소설 속에는 소우주와 같은 사람들의 삶이 담겨있다. 끝까지 읽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 인물들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상수와 경애의 겉모습만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낙오자 같고, 사회성 없는 꽉 막힌 사람들처럼 보일 것이다. 보이는 모습으로 평가하고 손가락질 하면서 싸구려 동정심을 보내고, 필요한 순간 적당히 이용하다가 때를 봐서 밟아버릴 수 있는 존재감 적은 혹은 없는 사람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자기 안에 수많은 ‘나’가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성장하며 겪어내야 했던 아프고 외로운 순간들로 꽉꽉 채우고 있다. 그 순간들이 바로 오늘날의 모습을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눈에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그 사람만의 세계는 살아가는 한 확장되고 깊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회사에서 강제퇴직 당하고 육체노동을 하는 일영이 경애에게 “힘이 나서 사는 게 아니다. 살아서 힘이 나는 거지.” 라고 말했던 것처럼. 


 성인이 되어 사귀게 된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과거의 어느 한 시절 같은 장소와시간에 함께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고 신기해할 때가 있다. 그때는 분명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던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깊은 인연을 맺고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살면서 한 번도 만날 일 없을 것 같았던 상수와 경애도 만남과 만남을 거듭한다. 그 중간에는 친구 은총이 있고, 반도미싱이라는 회사가 있으며, SNS라는 가상공간이 있다. 


 시인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말했지만 좀 더 나아가 그 섬과 섬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다리들이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그 위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의 발자국과 숨소리, 체온이나 음성과 같은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뒤를 추적해본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오게 되었을까. 분명 처음은 우연으로 시작했겠지만 수많은 갈림길에서 선택하고 또 선택하면서 자신과 마음이 닮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우연 속에 숨어있는 필연일 수밖에 없다. 처한 환경과 모습은 달라 보이지만 마음과 생각을 나누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를 떠나야 할 때 경애이자 수많은 언니들인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176) 


 살면서 조금씩 부스러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까. 단단한 바위들도 파도와 바람에 부딪쳐 처음 모습에서 여러 번 변해가는 데 직장과 일, 질병과 가족, 새로운 환경, 주변 사람들의 모함과 외면으로 우리들의 모습은 수십 번 깎이고 변해간다. 그렇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나’인 것이다. 결국 은총의 친구이고 팀장이자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준 언니였던 상수가, 은총이 좋아했던 여자아이며 상수의 한 명 밖에 없던 팀원이자 애인의 배신에 아파했던 마음을 상수(언니)에게 털어 놓은 피조였던 경애가 베트남이란 낯선 땅에서 서로의 진짜 모습들을 확인한 것처럼 말이다. 돌고 돌아 각자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상수가 경애를 기다린다. 어느 한번의 일요일에는 경애가 올 거라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349.p) 


 경애도 상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지금 당장 만나지 못 한다고 해서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된다. 수선떨지 않고 어느 순간 슬며시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오듯이 경애가 올 수도 있다. 그때까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다듬고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기위해 애를 쓰고 있는 중인가. 두 달 전에 돌아가신 아빠에게 묻고 싶지만 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슬퍼진다. 한동안 나의 마음은 기다리고 찾아가는 그 어디쯤 서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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