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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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선물처럼 다가온 순간은 무엇인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선물>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제목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지만 그 문장만으로 위안을 주었기에 호기심을 갖고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게다가 <<올리브 키터리지>>,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이라니……타의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선정해준 마지막 단편 <선물>부터 읽기 시작했다. 하나의 단편으로도 훌륭하지만 앞의 8편의 소설은 물론이고 작가의 다른 작품과도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어 친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최근 나에게 선물같은 순간은 무엇이었나?

 

  흘러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잠시 가슴이 먹먹했다. -   315.p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 살면서 매우 친했던 친구에게 추석 명절을 겸하여 안부전화를 했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1년에 한두 번 만나게 되고, 가끔 오해도 생기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지내왔다. 그러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 갈 일이 생겼고, 어렸을 때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다시 옛날 어린 아이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전 인사를 할 때, 친구는 내게 먼저 전화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건 어색한 말투로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할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꽉 차고 먹먹했다. 우린 다시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고, 시험을 핑계로 밤을 새며 만화책을 보거나 라디오를 들을 수는 없지만, 같은 추억을 간직하고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선물이라는 것을 안다.

 

  에이블에게는 링크 매켄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와의 대화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고, 가난하고 어려웠던 순간 속에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현재의 자신을 지켜봐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딸, 그 딸의 자녀들과 우아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지금의 모습 속에 숨겨 둔 잊고 싶었던 진짜 자신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에이블은 바쁜 일상 속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 중 반은 잃어버리고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에이블에게 삶이 수수께끼인 부분은,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잊어버린 후에도 그것을 지닌 채 살아간다는 사실이었다. - 335.p

 

 

 그는 링크 매켄지에게 덕분에 멋진 시간 - 너무나도 터무니없어서 오히려 절대적인 해방감을 주는 - 을 보냈다고, 누가 봐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 346.p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문장은 덤덤하고 일상적이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각자의 자리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듯 그녀의 작품도 일상적이다. 그런데 힘이 있고, 삶이 주는 끈적끈적한 불쾌감 속에 보석처럼 빛나는 한 순간을 찾아내게 된다. 현재의 내가 되기까지 수많은 상황과 부딪치고 견디고 깨지고 성장하며 지금에 이른 나와 주변의 사람들을 소환하게 만든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손을 내밀고 잡아준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삶이 무엇이든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그 미소가 그들에게는 고통에 찬 찡그림으로 보였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는 지금 그들을 남겨둔 채 초록빛 콩밭을 지나며 아주 가볍게 훌훌 -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 날아 있었다. 그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실을 가슴속에 지닌 채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스노볼을 사랑하는 어여쁜 소피아처럼 에이블에게도 친구가 생겼다고. 하지만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선물이 그런 시간에 그를 찾아올 수 있다면 무엇이든 …… 그가 눈을 떴고, 그래, 바로 거기 있었다. 온전한 깨달음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 - 347.p

 

  어제 태풍으로 인해 비가 많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도 엄마와 언니들과 아빠의 산소에 다녀왔다. 무섭게 퍼부었던 빗줄기도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지난 날 추억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며 웃었다. 돌아가신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어릴 적 친구도 돌아가신 아버지도 현재의 내 삶이 가능했던 이유다. 선물 같은 가을이 깊어간다. 태풍 피해가 매우 적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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