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을 것이다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2013121일 월요일, 친구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동안, 나는 복도 의자에 앉아 이 소설을 읽었다. 두툼한 잠바를 벗어 무릎에 안고 있었기에 그날의 차가웠던 기운이 그대로 느껴졌다. 친구가 손가락에 핫도그처럼 하얀 붕대를 감고 나올 때까지 나는 김연수 작가의 신작에 눈을 떼지 않고 읽어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제주도와 사랑, 빗소리를 관통하는 문장들을 읽으며 차정신이였던 파멜라 차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사람과 장소, 빗소리와 추억을 통과하면서 잊지 못할 순간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잊지 못할 한 순간들을 품고 있기에 현재의 또 다른 시간들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95번 고속도로를 타고 미국 동해안을 따라 쭉 내려갔다. 스무 시간 남짓, 그렇게 운전하는 동안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을 것이다./72

 

  누구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삶의 무늬를 만들어낸다. 막내 이모가 파멜라 차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도 비가 내릴 때 사월에는 미였다가 칠월에는 솔까지 올라가던 함석지붕 아래서 그와 함께 3개월 남짓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에서 바다 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진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 석 달 동안 밤이면 감독님 품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누워 있었지. / 81

 

  두 사람이 살았던 집은 분명 작고 초라한 집이었겠지. 누구의 남편이거나 가족에게 걱정을 안겨주는 동생이 아닌 서로의 연인으로 함석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의 도피로 얻은 시간과 나머지 시간을 맞바꾸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의 시간들은 이 순간을 간직하게 위해 남아 있는 건지도.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정의할 수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간이 없었다면 인생의 공평함도 슬픔에 처연하게 대처하는 법도 몰랐을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가슴에 묻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고 이야기 나누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한 순간의 그리움에 서글퍼지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고 가슴 철렁하며 두려워하는 마음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모든 것도 없었을 것이다.

 

  5년 만에 다시 이 소설을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갔을 때마다 내가 앉아 있던 병원의자와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 소독약 냄새가 떠올랐다. 그전 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며 미안해하던 친구 얼굴도 떠오르고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이처럼 멋지게 표현한 작가의 문장력에 함께 감탄했던 것도 떠올랐다. 소설이 소설로 끝나지 않고 내 몸 곳곳의 감각으로 남아 그때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 시간 때문에 다시 친구의 아팠던 손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모두 기다림 안에 있다.

기다리라 생각 없이. 너는 아직 생각할 준비가 안 돼 있을지니:

그러므로 어둠은 빛이, 그리고 고요는 춤이 되리라. / 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