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계절
구효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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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란 단어는 힘이 세다. 고통을 뚫고 나온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여름을 견딘다는 것은 뜨거운 땀을 흘리며힘을 다해 삶을 통과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일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많은 생명이 빛을 발하다 죽고 또 다른 생명들이 태어나는 것과 맞물려 있다. 5월의 연둣빛 나뭇잎이 부드럽고 순한 느낌을 주지만 한여름 나무의 초록은 너무나 강렬해서 오히려 공포감을 준다. 때때로 그 진한 초록빛이 목을 죄어오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계속 될 것 같은 여름도 결국 끝을 향해 간다.

 

 

  구효서의 <여름이 지나간다>에는 스물 두 살의 젊은 아내를 두고 떠났다가 60여 년 만에 돌아온 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일구고 키우고 물을 들이며 치열하게 삶을 견뎌온 가 등장한다.

 

 

  두 마리 누룩뱀이 계곡 쪽으로 빠르게 기어갔다. 개구리들이 놀라 물로 뛰어들며 민들레 씨앗을 건드렸다. 홀씨가 물 위에 눈처럼 흩어졌다. 파는 닭장에 들러 달걀을 살폈다. 뱀은 종종 달걀을 통째로 삼켰다. 파는 뱀을 쫓으며 닭을 키우고 개를 키우고 돼지를 키웠다. 숱한 밭작물을 키웠다. 아들을 키웠다. 그것들을 키우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실타래를 삶고 표백하고 염색하고 빨고 밟고 짜고 말리고 털지 않고는 나이를 먹을 것 같지 않았다. 세월이 멈출 것만 같았는데, 파는 무엇보다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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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시간이 흐르지 않을까 두려워 닭과 개와 돼지를 키우며, 실타래를 표백하고 염색했다. 세월이 멈출까봐 끊임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긴 세월이었지만 그 시간도 결국은 흘러가버렸다. 붉은 흙이 떨어지고 저 큰 팽나무가 심겨져 있는 자신이 직접 지은 집으로 돌아온 하는 늙어버린 아내에게 하고 싶었던 많은 말들을 결국 하지 못한다.

 

 

  머리카락이 표백한 실타래 같은 아내와 마주 쳤을 때, 그의 몸속엔 아무 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육십 년을 공글리며 별렀던 변명이 헛기침 같은 탄식으로 빠져나가고, 그의 입안엔 쓴 침이 고였다. 그것은 죄의식도 실의도 놀라움도 아닌, 텅 빔 그 자체였다. 본디 비었던 것이 비로소 그 빔으로 희귀한 것 같은 사정과 신념과 견딤과 변명 들이 워낙은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하는 그날 자신과 다름없이 망연하게 서 있던 파를 보았을 뿐이고. 그들 사이로 긴 여름의 오후가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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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 밖과 안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창가 의자에 앉아 파의 행동을 지켜보거나 마을에 있는 동굴 속을 헤맨다. 파는 여전히 돼지를 키우고, 닭을 키우고 실타래에 염색을 한다. 시간과 언어의 빈 공간을 채우지 못한 두 사람 사이로 여름이 지나간다. 처음에는 란 이름이 낯설었다. 그러나 부부이면서 타인과 같은 두 사람에게 다른 이름이나 호칭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하와 파로 흘러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다 보면 두 사람 사이에 굳이 변명과 해명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소설 전체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적막하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인간의 언어를 소거시킨 것 같지만 하와 파가 견뎌온 시간의 고통만큼 작품 속에는 다양한 생명들의 비명소리로 가득하다. 방망이를 들고 숲으로 들어간 소년이 퍽 퍽 무언가를 치는 소리, 새의 울음소리, 새들을 잡아 모가지를 꺾어 발효 고기를 만드는 사내의 소리와 그의 어린 아내가 밤마다 지르는 비명 소리, 암탉의 소리와 돼지의 소리, 전기 모기 퇴치에 걸려 모기들이 타죽는 소리, 두 사람을 취재하러 온 방송국 사람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이야기와 대학생들의 순진하고 이론적인 질문 등 수많은 소리가 하와 파 사이에 가득하다. 그 소리들은 여름을 살아가고 있는, 여름을 지나가는 소리이다.

 

 

  소리와 더불어 선명하게 기억이 남는 장면이 있다. 바로 파가 헛간 풀방구리에 둥지를 튼 검은 쥐들의 새끼들을 닭들의 먹이로 던져주는 장면이다.

 

 

  파는 작고 흰 것들을 바닥에 던져주었다. 닭들이 몰려나왔다. 하는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파가 던져준 것은 아직 눈도 안 뜬 쥐새끼였다. 새하얀 것에서 살짝 분홍빛이 비쳤다. 갈피를 못 잡고 어릿거리는 것들을 닭들이 달려가 쪼았다. 한입에 삼키지 못해 찢고 찧고 헤저었다. 하는 돼지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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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들이 쥐새끼를 쪼는 소리도 쥐들의 고통소리도 그것을 어딘가에서 느끼고 있을 어미 쥐의 의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잔인하고 치열하게 생명을 키워내는 여름.

 

 

  소설집 전체의 제목이 아닌 계절이다. 각 계절마다 하와 파 같은 또 다른 인생들이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품고 있을 것이다. 전 국민이 폭염 속에서 힘든 여름을 견디고 있는 요즘, 또 어떤 생명들이 다른 계절을 겪고 견디어 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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