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실연'이란 미명으로 나 자신을 지독히도 학대하던 때,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에서 별 웃기지도 않은 책들을 읽은적이 있다. "그 남자에게 전화하지 마라", "똑똑하게 사랑하라", "시크릿" 등등...제목만 봐도 뭔가 불순함이 팍팍 풍기지 않나.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 뻔히 알면서도 그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책들을 사들이는 나 자신이 웃겨서 스스로에게 냉소를 퍼부었었다. (결국은 대충 읽다 말았다. 그런 류의 책들을 몇 권 읽다 보면 무슨 내용이 이어질지 빤하다. 어쩌면 책의 내용보다 무엇을 '소비'하는것으로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 싶었던 건지도 ^^) 그 때 진득이 '사랑의 기술'같은 책들이나 읽었으면 좋았을걸. 하긴 그 당시엔 생각하는것 조차 귀찮았을 게다. '상처받은'내게 필요한건 오직 위로와 동정 뿐이었으니까. 근데 그 '위로'라는것이 받으면 받을수록 공허해지고 나 자신이 점점 더 초라해지는 것이다.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는 자기연민의 고리를 하염없이 맴도는 악순환. 이 책은 딱 잘라 말한다. "대부분의 심리서들이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위안과 동정으로 가득하지만, 동정과 연민만큼 인간을 나약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공허한 위로는 자신이 위로받는 대상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줄 뿐이다. 어쨌든, 이 책은 사랑에 대해 알고 싶으나 그나물에 그밥인 '작업의 정석'들에 신물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시야를 넓히면 사랑의 환상을 신봉하는 우리 모두에게 강한 펀치한방을 날리는 책. ^^

호모 에로스. '에로'라는 말이 일상에선 참 저급하게 쓰이고 있긴 하지만 멋진 정의다.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 그런데 이 책은 뭔가 통속적인 '사랑 방정식'해법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삶 전체를 갈아엎으라는 지극히 '불온한'책이다.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 혁명"이라는 부제를 유심히 보시라. 방점은 "에로스" 보다는 "혁명"쪽이다(책 내용을 따른다면 사랑의 본질은 가히 혁명적이다. 뒤집으면, 혁명적이지 않은것은 사랑이 아니다.) 혁명,하면 뭔가 불온해서 부르르 치가 떨리는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며 스팀 좀 나올거다. 우리의 통념을 여지없이 깨버리고 비웃고 끊임없이 '탈주'로 유혹한다. 기독교와 자본에 대한 비판이 양념처럼 등장하는 '사랑학 개론'이라니. 코뮌주의자 책 답게 맑스와 코뮌에 대한 언급도 심심찮게 나오고. (뭐 그렇다고 이 책이 '사랑'을 미끼로 사람들을 꾀려는 음험한 책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제대로 사랑하는 법"이 일관된 주제다. 하긴 조선일보식 사고라면 "사특한 목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책이 될지도.)      

자본주의에 맞게 '소유욕'으로 변해버린 사랑에 대한 비판은 (이 책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혹은 "소유나 존재냐"를 보는것이 더 깊이있는 독서가 될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장점은 현재 한국의 상황에 맞는 예시 - 정이현의 소설 인용, 주변인들의 인터뷰, 드라마 사례 등 - 들이 풍부한 것, 구어체로 아주 쉽게 씌였다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저자가 '고전평론가'고, 현재 '동의보감'을 공부하고 있어서 한의학, 혹은 동양철학에 입각해 상황을 분석해 놓은 부분도 있다는 것. 이건 장점이자 단점인데 딱딱하고 직선적인 서양철학적 설명보다는 무언가 간결하면서도 깊이있는 선사들의 말이 더 와닿을때가 있는가 하면, 동의보감의 정기신 이론으로 몸의 불균형상태를 설명하는 부분은 한의학도인 나도 약간 갸우뚱이다. (참고로 나는 아직 동의보감을 정식으로 공부해본적은 없기때문에 가타부타 할 처지가 아니긴 하지만. '虛熱이 뜬다'든지, '肝腎陰虛'라는 한의학적 개념/설명에는 익숙한데도 뭔가 이상했다. 내용의 맞고 틀림을 떠나서 맥락에 적절한 논거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부터 사랑의 달인들이 해 왔던 말들과 대동소이하다. 늘상 듣는 말이지만 막상 체화하긴 어려운 테제들. 사랑은 '나'의 문제이며 모든 관계가 그렇듯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하여 '영원한 사랑'운운하는 환상을 버리고 주체적으로 가꿔 나가야 하는 '유기체'같은 것이라는 것. '사랑하는 법'역시 공부가 필요한 고난도 기술이라는 것 등등 대표적인 구절 몇가락을 들어보자.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존재의 궤적을 만든다. 존재의 흐름과 궤적, 그것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한다. 내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종결까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내 안에서 사랑이 어떻게 일어나고 소멸되는지를 철저히 살피겠다는,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괴물"과 맞짱을 뜨겠다는 승부욕이 있어야 한다. 딱 그 의욕과 의지만큼 '자기'로부터 떠날 수 있으리니" 

느낌이 오는가? 솔직히 이런 얘기들만 가득차 있다면 이 책 자체가 강한 인상을 주지는 않았을게다. 이런 얘기를 풀어놓는 사랑의 고수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않나. 자칭 "코뮌주의자"의 작품인 만큼 이 책은 태생적으로 삐딱하다. 우리가 열광하는 '국가경쟁력'이 사실은 이팔청춘의 피끓는 성에너지를 쥐어짜낸 작품이라는 것, 상품/쇼핑의 늪에 갇혀버린 자본주의적 연애, 그리고 끊임없이 환상을 생산해내는 드라마들 비판은 기본이고 아예 "화폐권력에 저항하라"는 선동까지! " 우리시대 모든 연인들이 연애와 쇼핑 사이의 이 은밀한 공모관계만 해체해도 신자유주의 체제는 휘청거릴"거라는 생각을 해봤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렇게 한참을 화폐권력에 길들여진 빤한 연애를 비판하다가는 사랑=공부라는 저자의 신념답게 "사랑하는 순간부터 책을 읽으라"는 모범적인(!) 구호를 외친다. 가장 좋은 공부/연애방법은 함께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는 것이라나? 이거 평범한 대한민국 청춘이라면 멍~하게 들고서서 "뭐 이런 책이 다 있어?"할 판이다. 사랑이 '느낌'이 아니라 동사라는 것,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할 '공부'라고 말한 이는 여럿 있었지만 책과 세미나를 통해 연애를 하라니...솔직한 심정으로 그런 연애 한번 해 봤으면 좋겠다. ^^

"사랑이 위대한 건 삶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지평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 번의 사랑을 했는데도 삶의 지평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면, 또 존재의 내공이 커지지 않았다면 그건 좀 의심해 봐야한다. 사랑이 아니라, 습관적 연애중독증일 가능성이 많다. 연애중독증의 가장 큰 특징은 절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이 책이 맘에 드는 이유 하나 더. 몸과 정신을 하나로 보는 동양적 사고에 맞게 사랑을 '심리'의 문제가 아니라 엄청난 '몸적 사건'으로 바라본다는 것. 내가 푹 빠져버린 "빌헬름 라이히"도 여러번 인용된다. 80년대를 겪어온 사람으로서 당시 "사회를 변혁하겠다고 존재를 다 건 운동권들이, 일상과 신체의 가장 핵심적 이슈인 사랑과 성에 대해서는 어떤 학습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한다. 여기서 인용되는 라이히의 말 "사랑, 노동, 지식은 우리 생활의 원천이며, 이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야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은 오르가즘 능력=생기/생명력이라는 라이히의 이론을 전제로 깐 것이기 때문에 온 존재를 뒤엎을만한 에너지의 원천이요 오롯이 집중해야 할 중대한 사건이자 전 생에에 걸친 학습/실천이다. 몇십년전에 비해 성과 연애가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섹스는 매춘이나 원나잇스탠드 등 쾌락의 도구로, 연애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드라마의 환상속에 갇혀있다는 지적. 고정된 사회적 통념을 깨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탈주선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그 사랑은 태생적으로 혁명적이다. (아님, 반동적이거나 ^^)  

간만에 '불온한'책을 읽으니까 신선하다. '혁명'이라는 불온한 단어와 '에로스'가 결합하니 이렇게 유쾌하고 도발적이구나. 하긴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대라면 88만원 세대는 '암울함'의 상징이 아니라 '역동적 폭팔력'으로 승화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언뜻 보인다. 2008년 초만해도 아무도 '촛불'을 예상하지 못했듯이.  

사족 :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에서 신랄하고 우스꽝스럽게 풍자했던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연애소설이 이 책에서는 상당히 미화되서 그려진다. "사상"을 주입하려는 문학작품은 목적이 지나치면 웃겨지기 쉬운데 실제 소설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  내 님이 다른사람과 사랑해서 더 행복하다면 기꺼이 행복하게 보내주겠다는 '달인'의 경지는 나같은 범인들에겐 멀고 먼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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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 다른 십대의 탄생]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4-06 17:22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다락방 2008-12-27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지막에 언급하신 그런 '달인'의 경지는 저같은 범인들에게도 멀고 먼 이야기에요. 아니 솔직히, 개떡같은 이야기지요. 내 님인 주제에 어디 다른 사람과 사랑할 생각을 해요, 하기는!!

저기 저 위에 처음 단락에서 언급하신 실연에 대한 이론서(?)나 자기계발서등을 읽어 보진 않았지만 물론 말씀하신 것 처럼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은 가지요. 그런데 저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혹시 읽어보셨나요? 완전 재미있어서 계속 키득키득 웃고 밑줄도 박박 긋고 그랬지요.


자자, 이제 Jade님과 제게 남은건 '희망'인 겁니까?
:)

Jade 2008-12-27 18:27   좋아요 0 | URL
그 책은 미처(?) 못 봤는데 제목이 강렬한데요? ㅋㅋ 제목만 봐도 딱 느낌이 와요...ㅎㅎ

다락방님, 희망은 '남는'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거예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