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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평점 :
2002년 대선때 나는 예비 고3이었다. 정치에 대해 아는것도 없고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보다 주변의 선거권을 가진 어른들의 지지연설을 듣는것이 재미있었다. 선거 전날 정몽중후보의 갑작스런 이탈에 노무현 지지자들은 이를 갈았었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자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그저 이회창후보가 안되었다는 사실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더랬지. 어찌어찌 탄핵열풍이 불고 (그즈음 택시를 탔는데 나이 지긋하신 기사님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탄핵반대 촛불집회뉴스에 "그 노무현 빨갱이 새끼"운운하던 기억이 난다. 풋) 그 덕에 17대 총선에서 참패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번 대선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 기이한 선거였고ㅡ 총선역시 "한나라당이 개헌선을 넘어설것인가"에 맞춰졌었지. 하긴 생각해보면 이번 총선은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평화통일가정당은 전 지역구 출마로 어마어마한 돈을 나라에 헌납한 셈이고ㅡ '뉴타운'의 승리이기도 하고, '친박연대'라는 정당도 생길수 있음을 확인하고ㅡ 비례대표 1번 양정례씨를 매일 신문에서 만나기도 하고. 아직 한국사회가 '역동적'이라는 반증일까?
만나는 사람들마다 "막장으로 가는 중"이라며 우울한 전망을 내 놓는다. "존재에 반하는 의식"은 이제 너무 많이 들어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40여년만에 선거권 취득 연령을 낮춰놓았지만 정작 많은 젊은층들이 선거/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어떤 신념처럼 "경제발전"에 휘말리고. 사상 최저의 투표율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일까 혹은 침묵시위일까? 총선 개표때 화제가 된 "도저히 뽑아드릴 사람이 없다"고 적힌 투표용지는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이 책은 1948년이후 치러진 대선/총선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자분자분 풀어놓는다. 서중식씨는 "선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것이 결코 상식이 될 수 없다. 선거를 통해 민의가 어떻게 표출되며, 선거가 한국 사회를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화시켰느냐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이끌어가지만 교과서에서 배웠던 부끄러운 부정선거들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서술한다. 비밀선거원칙을 무색케하는 3/9인조선거, 상대후보에 대한 색깔공격, 개표부정, 정치깡패동원 등등. 지금 막장, 막장 하지만 이보다 더 막장일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런 암울한 시기 뒤에 약속이라도 한 듯'신선한 선거바람'이 불고 사회가 바뀐다. 긴 역사 속에서 보면 부정한권력은 늘 꼬리를 내리고 만다.
"이성의 간지(奸智)"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자신을 반대하는 국회분위기를 뒤엎고자 헌법을 뒤엎고 정치파동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한 이승만이 바로 그 직선제 때문에 덜미를 잡히고ㅡ 박정희의 권력욕을 충족시켜준 유신 체제로 인해 몰락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제도는 희한하게도 독재권력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경우가 많다. 지방자치 선거나 공천제도 처음엔 이승만 독재를 위한 도구로서 도입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인지. 2004년 민노당에게 10석을 안겨준 비례대표제도 처음엔 박정희 정권 여당 의석수를 늘려주기위해 도입된 것이라니. (어제 서중석 선생은 강연을 다녀왔는데 "우리 민주주의 역사는 참 역설적이고 풍자적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암울하다고 비관만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번 선거의 50%이하 투표율은 훗날 어떤 역설을 보여줄지 궁금하다"고 너스레를 떠신다.)
우리나라 국민의 역동성/잠재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많다. 단적인 예로 1910년까지 군주 아닌 사람을 모신적 없던 철저한 "왕 중심 국가"였던 우리가 1910년대부터 공화제를 주장하고, 광복 이후엔 이승만/한민당 세력마저도 '보통선거'를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왕'을 버릴 수 있었는지. 최악의 선거라는 67년 '망국선거' 4년 후 신선한 야당바람으로 '균형국회'를 이루어 낸 71년 선거는 또 어떤가. (이때는 박정희 본거지인 대구에서도 거의 야당이 득세했다며 이 때만해도 '균형감각'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2004년 총선도 탄핵바람에 맞선 잠재력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지. 저자는 73년 이후 북한 경제력이 남쪽에 뒤지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로 '선거'를 생각한다며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선거의 역동성을 높이 평가한다. (단, 우리 역사에서는 역설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많아 우리의 시민의식과 궤를 같이했던것은 아니라는 우려를 덧붙인다. 단적인 예로 87년 대투쟁에서 16년전의 "직선제 쟁취"를 외칠 수 밖에 없던 사례를 든다.)
"못살겠다 갈아보자","갈아봤자 별수 없다"등 당시 유권자들을 휘어잡았던 구호들이 눈에 띈다. 20,30만 유권자를 동원했던 신익희 선생 유세, 김대중 후보 유세 사진을 보고 있으면 당시의 분위기가 전해지는 듯 가슴이 벅찬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이런 감동적인 장면을 만들어냈겠지. 모든것이 정치적인 지금 우리세대의 정치감각은 오히려 한없이 무뎌진듯 하다. 변화를 향한 뜨거운 가슴마저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책을 읽다 이런 의문이 들었다. 87년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된것은 양 김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ㅡ 어떻게 노태우가 30%가 넘는 지지율을 얻을 수 있었을까? 누가 집권하든 기득권층을 대변하는것은 마찬가지 였기 때문일까. 이번 대선의 풍경이 겹쳐진다. 가진거라곤 초라한 사람들이 '경제성장'의 믿음으로 이명박후보를 찍는 풍경들. 말도 안되는 '잃어버린 10년'논리들. "정당은.....'정권탈취'를 꿈꿔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던 이승만이나 "내 자리 뺏길뻔 했네"라며 안도했던 박정희의 "대통령은 내 것"이라는 논리와 어쩜 그렇게 닮아있는지.
선거가 역동적이려면 유권자들이 단합해야 한다. 찍을 사람 없다고 방관/포기한다고 세상이 바뀌는것은 아니니까. 막장선거였던 67년 선거 후 4년만에 정치판도를 바꿨던 유권자 의식은 지금도 살아있다고 믿고싶다. 아니, 다시 살려내야겠지. 이 책의 장점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현대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단어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선정한 느낌. (어제 강연회에서도 이런 신중함이 엿보였다.) 중립적이지만 위트와 풍자가 스며있어 재미와 고민거리를 한아름 안겨준다. 암울하다고, 혹은 어렵다고 현대사를 외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