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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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닥다닥 붙어있는 표지의 판자집들. 드문드문 섞인 하늘색/붉은색의 강렬한 원색 지붕이 오히려 처량하다. 드센 바람이라도 지나갔는지 지붕 위엔 벽돌조각과 온갖 쓰레기들이 어지러이 흩날려 있다. 보기만 해도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듯한 이곳 역시 누군가에겐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아니, 사실은 우리가 그들을 저곳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조용히 그러나 치밀하게.

가끔 돈이 없어 하루 몇천원짜리 쪽방에서 지내다가 죽은이가 신문에 등장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닿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렇게 지나가고, 의도된 무관심 속에 방치된 그곳엔 또 다른 사람들이 모여든다. '의료의 사각지대' 혹은 '구멍난 복지혜택' 운운 하지만 정말 그들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방치하는 것인가? 적어도 정부차원에선 그 어떤 개인보다 그들의 실상을 잘 알고 있으리라. 달리 손 쓸 능력이 없기도 하거니와 의지도 없기에, '개인의 주거권'이니 '인간의 존엄성' 등등은 '경제적 합리성'이란 냉정한 저울대에서 언제나 뒷전이다. 그들이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착취할수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있으므로.

단위면적당 집세가 가장 비싼 곳은, 슬럼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곳이라는 사실. 생필품을 사는데 필요한 돈이 미국의 중산층보다 슬럼주민이 다섯배 가까이 높다는 아이러니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슬럼 내에서의 빈부격차는 또다른 착취-피착취 관계를 만들어낸다. 슬럼에서 깨끗한 물과 화장실은 주민의 권리가 아니라 좋은 이윤창출 수단이다.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수도시설을 갖춰 저렴한 수돗물을 이용하면서 상수도 설치 비용이 없는 빈민들에게 병에 담아 비싸게 팔고 그나마도 사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수가 뒤섞인 물을 마실수 밖에 없다. 몇천명이 쓰는 공용화장실은 이미 그 구실을 못하기에 유료화장실이 '각광받는 사업'이라는데 하루 1번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기본급의 10%를 지불해야 하는 곳도 있다. 국가 혹은 국제 단체에서 지원받은 돈은 대형 NGO들이 가로채거나 주택 건설 등으로 부동산 투기를 불러오기 때문에 빈민들에게 돌아가는 실질적인 혜택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인간이 '경제적 동물'이라는 말은, 타인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인식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개인'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는 ㅡ 너무 쉽게 모든것을 '개인 탓'으로 돌려버린다. 몸이 아픈것도, 일자리를 잃은 것도, 가난한 것도 모두 개인의 능력부족이거나 타고난 천성탓이다. 필요할때는 '국민국가' 어쩌고 하면서 하나로 뭉칠것을 강요하다가도 사회의 구조적 모순앞엔 입을 다물어버리는 간사함이란!  스스로 '비운의 88만원 세대'라는것을 인식하면서도 "바리케이드와 짱돌을 들라"는 선동적인 구호앞엔 현 20대를 믿지 못하는 '사회적 불신'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멋진 작품이다. 이 책에선 일국가 내 뿐 아니라 NGO등 국제기구를 동원해서 지역사회까지 파고드는 "부드러운 제국주의" 를 꼬집는다.

   
  NGO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주민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 이상을 박탈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계급투쟁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NGO가 채택/선전하는 실천 방안은 억압받는 주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깨닫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 대한 동정심과 인도주의적 감상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외부의 호의를 구걸하는 것이다. 사실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이들 대행업체 및 조직들이 체계적으로 개입하는 이유는 주민들이 선동적인 방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조직들은 주민들이 거시적인 차원에서 제국주의의 정치적 해약들을 경계하게 하는 대신, 지역사회의 문제들에 매몰되어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p.107. 주택문제 활동가 P.K.Das의 말 인용)  
   

이 책에 실린 슬럼의 풍경들은 거의 상상을 초월할만큼 처절하지만 저자는 감정적 과잉 없이 열악한 슬럼환경을 묘사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착취행태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똥통 생활"이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챕터는 배설물을 처리하지 못해 그야말로 "똥 위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도시들의 이야기다. 화장실이 없어 배설물을 봉지에 담아 골목으로 던지거나 운전자에게 인분 덩어리를 던지겠다 위협하며 통행료를 받아내는 아이들. 사람들 눈을 피해 배변하기 위해 (강간/성추행의 위험을 무릅쓰고) 새벽까지 기다려야 하는 여자들. 그리고 그 덕에 각광받고 있는 "유료 화장실 사업"과 "식수 사업". 이 모든게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다. 빈약한 재료로 지은 허름한 가옥들은 산사태/지진의 위협에서도 자유롭지 못한데 정작 가장 두려운것은 '의도적 방화'란다. (개는 너무 빨리 죽어서 안쓰고, 기름에 적신 쥐나 고양이에 불을 붙여 풀어놓는 '효과적인 방화법'이 나와있다.) 국가 행사라도 있을라치면 온갖 공권력을 동원하여 쓰레기 치우듯 빈민들을 몰아내는 주체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일까?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란 미명으로 그나마 있던 공공부분마저 축소되었고 ㅡ 생존을 위해 "수년 내 죽음을 보장하는" 인력거꾼이 되거나 짐스러운 아이가 "마녀"로 낙인찍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부분에선 참혹하다 못해 울화가 터진다. 그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건 감정섞인 울음이나 동정이 아니라 분노다. 행동으로 이어지는 분노만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는 기반일테니까. (* 이 책에선 슬럼주민들의 저항보단 슬럼에 가해지는 폭력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이 책의 속편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슬럼 기반 투쟁의 역사와 미래"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한다.)  

뒤에 실린 우석훈 박사의 보론도 재미있다. 경제학자답게 슬럼의 원인으로 '경제 엘리트'인 중산층의 '배신'을 꼽는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빈민들이 내는 부가가치세로 자기들에게 유리한 우회도로를 건설한다든지 '슬럼 지주'로서 '유료화장실'에 투자하는 중산층들은 더욱 더 열악한 환경으로 슬럼이 퍼져가도록 방조한다. 우리나라 지방도시에서 슬럼현상이 생기지 않는것은 그 주민들이 '수도권'으로 떠났기 때문이라 추측하며 ㅡ 빠른 비정규직의 증가 속도와 카지노/다단계 등 점차 커지는 비공식 경제 비중을 볼 때, 현재의 88만원 세대들은 본격적인 '슬럼 거주'의 가능성이 크다는 어두운 결론을 내린다. 중대형 아파트 건설비율이 높아지는 것은ㅡ 결론적으로 구매력이 없는 사람들의 주거환경을 더욱 열악하게 만든다는 인과관계가 잔인하다. '부익부 빈익빈'은 자본주의의 지극히 당연한 논리일 뿐일까?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는 명제가 여기서도 되풀이 된다.

"한 사람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은 그가 사는 주택의 위상에 따라 형성되는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글쎄, "사는 주택의 위상에 따라"서만 결정된다면 오히려 변화는 쉬울지도 모르겠다. '중산층'이라는 애매한 단어는 아무나 자기가 '중산층'이라고 느끼도록 꼬드기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다. "어쩔 수 없다"는 그들의 논리에 속지말고, 빈곤층이 '수혜자'라며 쓸데없는데 게거품물지 말자. 자기 '존재에 적합한 의식'만 가져도 분명 세상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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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8-04-02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이드님의 별 다섯개를 받은 책이라니 (별점평가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기대되는 걸요. 책 읽어보고 리뷰를 봐야겠네요.

Jade 2008-04-02 03:46   좋아요 0 | URL
어라 전 별점이 후한 편이예요 ㅋㅋ 이 책은 저도 추천받은건데 좋았어요!
(사실 좋다기 보단 열받았죠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