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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현재 지구상엔 약 6000~7000개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많을 줄이야. 그러나 몇몇 힘있고 덩치 큰 나라의 언어를 빼면 대부분의 언어는 만 명 이하가 사용하는 '주변어'이고 상당수는 후대로 계승되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나마 언어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언어는 지층 속 화석처럼 존재의 흔적이라도 남길테지만 흔적도 남기지 못한 많은 언어들이 있다. 모든것은 변하는 것 - 새로 태어나는것이 있으면 죽는것도 있기 마련이라는 진리 앞에, 쓰이지 않는 언어가 사라지는건 일종의 '순리'라고 보일수도 있지만 그 '지극히 당연한 죽음'이 사실은 의도된 '살해'라는 게다.
사라져가는 동/식물에 대한 중요성- 생태계 붕괴-은 조금씩 퍼져서 사람들 대개는 동/식물의 멸종을 안타까워한다. 그럼 사라져가는 언어들은? 이 책의 주요개념중 하나가 '언어생태적 관점'이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지도/도표들은 생물학적 다양성과 언어적 다양성과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언어적 다양성의 감소는 무엇을 의미하는걸까? (흔히 언어는 민족의 '얼'을 담고 있다 말하는데 요즘같은 사회에서 민족의 특성 운운하는것은 특정 민족의 이익을 위한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좀 더 범위를 넓혀 언어가 사용자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는 것은 - 교과서에서 배운 예로는, 이누이트 족에게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여러가지라는 것, 한글엔 'yellow-노랑'을 나타내는 수십가지 표현이 있는 것 등이 있다. - 사용자들의 생활상-문화를 반영한다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서구 문명이 기록하지 못한 수백,수천종의 생물을 구별하는 언어를 예로들어 언어에 담긴 지식의 소멸을 안타까워 하는 동시에, 그 곳 생태계에 적합한 농경/채집방법(당연히, 그곳 언어에 반영되어 있다)을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서구식 농경방법을 도입한 결과 걷잡을 수 없는 생태계 파괴만을 가져온 사례를 비판한다. 그 외에, 언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체계화하고 분류한다는 점에서 언어적 다양성은 인간의 의식구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시각을 제공해준다는 것 - 인간의 언어가 목적어ㅡ주어ㅡ동사의 어순을 가질수도 있음을 보여준 한 소규모집단의 언어가 있다. - 등으로 언어적 다양성을 옹호한다.
**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이상으로 보려는 흐름에 대한 반론도 많다. 고종석은 '감염된 언어'에서 "영어의 to be에 해당하는 동사가 스페인어에서는 ser와 ester로 구분되는 것을 근거로 '존재'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더 섬세한 성찰을 가정한다거나, 영어의 to have가 지닌 의미를 흔히 '있다(有)'라는 동사로 표현하는 동아시어어를 근거로 동아시아 사람들의 특이한 소유관념을 가정하는것은 너무 빈약한것"이라며, "근본적인 지각의 범주와 인식작용은 언어들의 표면구조와는 독립적인 보편성을 띠고 있고, 그 지각과 인식의 보편성을 반영하는 언어들도, 촘스키 이후의 언어학자들이 가정하듯, 심층구조에서는서로 동일한 문법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것이 옳다"라고 말한다.(감염된언어. p.205) 각 언어마다 상이한 인식체계가 '다른 세계관'까지 이어지진 않더라도 그 '차이의 존재'를 통해 주된 사고방식을 반성하는 계기는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의학을 예로 들면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관점을 토대로 질병을 '제거해야 되는 특정 실체'라고 인식했던 근대 의학은 점점 인체를 통일된 유기체로, 질병을 '전체 시스템 하의 기능이상'으로 보는 지극히 동양의학적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 (사실 이런 동양적/서양적이라는 이분법도 위험하기는 하다)
사람들이 그저 편리에 의해 더 편한 언어를 선택한다면, 사라지는 언어들이 애석하기는 해도 나쁘다고 말할 순 없을게다. 쓰이지 않는 기관들이 쇠퇴한 진화의 역사를 본다면. 하지만 중심부 언어가 퍼지는 경로는 대개 폭력적인 방식으로 주변부 언어를 말살하는 것이다. 왜 식민지 종주국들이 피식민지인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려 했을까? 그렇게 '열등한'민족이라면 처음부터 상대하지 않았으면 될것을 ㅡ 자본주의 사회는 착취당하는 노예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구조다. 처음부터 새로운 시장개척이 목적이었음에도 마치 그들의 문화가 열등해서 지배당하는 것처럼.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자기모멸감을 심어주기 위해 선택한 효과적인 방법이 (스스로 선택한것이 아닌)문화/언어를 억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사람이 아무리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들 백인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날이 오지 않았으면 싶다만 만일 영어가 전 세계 공용어가 되면 모든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살 수 있을까? 기득권층은 어떻게든 다수와 구별되는 자기만의 특권을 찾아낼게다. 형식적으론 식민지 지배가 종료된 지금도 소수 언어를 억압하는 이유에 대해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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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영국의 언론에서 종종 다중 언어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무슨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 계급이 통제하지 못하는 지식이나 조직을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p.2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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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 뉴기니의 소수민족들은 이상적인 "평등한" 이중언어국가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부족의 언어 뿐 아니라 이웃 부족의 언어 한두가지나 주변지역에서 통용되는 언어 하나쯤은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통념과 다르게 부족들간의 접촉이 잦아질수록 '중심부 언어'로 통합되는것이 아니라 - 많은 언어들이 서로 어휘과 구조를 차용하기는 했지만 언어의 차이점은 계속 존속되었고 부족간 차이에 대한 의식은 종종 자부심을 높이기 때문에 강조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단, 유럽인들이 도래하면서부터는 그들 문화의 소멸과 함께 언어도 소멸해가고 있지만.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는 이중언어 사용은 누군가의 말처럼 "하나의 다른 영혼을 갖는것"과 같은지 모르지만 특정 언어를 모르는 것/사용하는 것이 사회적 불이익으로 이어진다면 그나마 가진 하나의 영혼을 좀먹는 열등감만 키우는 것이다.
책 7장 "왜 언어를 보존해야만 할까?"를 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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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화는 전통 사회에 대해 상당히 정신분열적인 사고를 보여 왔다. 그들은 전통 사회를 후진적이고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을 초월하며 조화롭고 자족적인 그 무엇인가를 대표하는 존재로 이상화하며, 훼손되지 않게 보존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첫번째 관점은 분명히 전통사회들의 해체를 정당화하는 노선이다. 그러나 두번째 관점 역시 전통 사회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진보할 권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들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다....선진국들이 개발을 추진하느라고 환경을 황폐화시켜 놓고, 이제 와서 보존 운운하며 설교하는 것은 그다지 공평한 처사가 아니다. 선진국들이 지키지도 않앗던 요구 사항을 떠넘기지 않아도 후진국들은 충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 요구는 후진국들이 열망하는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하게 막을것이다.(p.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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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나왔던 강대국들의 위선적 행태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자기들 이익을 위해 신나게 열대 숲을 파괴하고 그곳에 살던 소수민족들을 쫓아낼 땐 언제고 '언어의 소멸'은 자발적 선택 운운하는 것이나, 후진국에서 뒤쫓아가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보고 '지구의 허파'운운하며 근엄하게 설교하는 것이나. 언제나 자기 상황에 맞게 이데올로기를 양산하는 그들의 논리에 신물이 난다.
첫머리는 사라지는 언어의 마지막 생존자들의 죽음이라는. 안타까움에서 시작하지만 끝부분엔 자각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언어들이 나온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필요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조성이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하는 저들의 논리에 맞춰 '언어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재미있다. (물론, 저들의 자유란 궁극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자유'겠지만 어쨌든 온갖 논리에 '자유'를 갖다붙이며 옹호하는게 뻔한 레퍼토리니까) 이 책은 언어의 보존을 감상적 민족주의나 당위에 호소하지 않고 '생태계 보존"이라는 보편적 화두와 결합시켜 설득력있게 펼쳐나간다. '영어 몰입교육'을 두고 국가 경쟁력이니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니 하는 뻔한 논쟁들 보다 이런류의 책이 '언어의 중요성'을 훨씬 더 각인시키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