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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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고통을 전해듣는 걸 '즐기는'인간이 있을까? 끔찍한 사건을 겪은 피해자들의 증언이, 자연재해나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결과라면, 하여 듣는이에게 인간 본성안에 놓인 추잡함을 마주보게 한다면. 듣는 것 자체가 생명을 갉아먹는 듯한 끔찍함이 아닐까? 하지만 불쾌한 사실을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욕망이 -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잊으라 강요하고, 때로는 "피해자가 자초한 것이다" 혹은 "이제 과거를 털로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로 바뀌는 것이 언제나 소수일수밖에 없는 피해자에겐 더욱 절망적이다. 여태껏 일어났던 잔학행위들에 대해 늘 그런식으로 수습되어오지 않았나. 감당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선 믿고싶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 레비와 그의 동료들은 수용소에서 가족들이 자신의 증언에 시큰둥하게 답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나치 수용소 생존자들을 연구한 한 정신의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과 피해자는 공동체가 잊고자 하는 무엇이다. 망각의 베일은 고통이 담긴 불쾌한 모든 것들에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얼굴을 맞댄 두 측면을 발견한다. 한편은 잊고자 소망하지만 잊지 못하는 피해자이고, 다른 편은 잊기를 원하고 또한 그러는데 성공하는 강하고 무의식적인 동기를 지닌 다른 모두이다. 그 대립은....늘 양편 모두에게 너무 고통스럽다. 가장 약한 편이......이렇게 불평등한 침묵의 대화 속에서 패배자의 자리에 남겨 진다. (레오 아이팅거)  
   

나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나마 살려놓은 사람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학대했는지는 이미 '상식'처럼 알려져 있다. 끔찍한 일이 '상식'이 된다는 것은 - 얼마간은 그에 대해 무덤덤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긴 나치 뿐이랴. 한 인간 집단이 다른 집단에 저지를 끔찍한 일들이 너무도 많아서 - 마치 물을 타 희석하듯 고통에 대한 기억도, 생존자들의 증언도 묽어지는것 같다. '자연스럽다'기보단 의도적으로 잊혀지는 생채기들. 몇 년간 사과만 해오던 서독에서 - "사실 이런 잔학행위는 나치 이전에도 있었다.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다"는 논지의 연구들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역사 속 다른 상처들을 되짚으며 인간이 나약하고 불완전한, 쉽게 잔인하게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잊지 않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원래 이렇게 악하니까 우리가 더이상 사과하면서 괴로워하지 말자"라는 건, 얼마나 편리하고 손쉬운 해결방법인지!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자명한 진리는, 보기 싫은 것들을 "못 봤다, 몰랐다"고 할 수 있는 손쉬운 면죄부가 된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늘 불안해하는 레비에게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느냐" "나는 유대인들을 학대하는 흔적을 보지 못했다"고 천연덕 스럽게 말하는 뉠러 박사처럼. 

가해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왜, 피해자가 더욱 죄책감 느끼고 고통받아야 하는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살아남아서도 그 기억때문에 고통스럽다. 레비는 살아남을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잔인한 실상을 증언하기 위해 버텼다고 하지만 앞서 죽어나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사실 자기는 '진정한 증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그래도 레비는 - 결국 자살하지만 아우슈비츠 이후 수십년을 - 자신의 '이성적 사고'를 믿었기에 잘 살아낸건지도 모른다. 다른 외상 피해자들은 그 기억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하기도 하고 남은 인생을 피폐하게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리학자들은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다시 들여다 보고 '있는 그대로'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그 문제로부터 풀려난다고 말하지만 고통의 기억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겁지 않을까. 아니, 진정 감당하기 힘든건 기억을 떠올리는 것보다 그 기억을 잊고싶어하는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 혹은 왜곡일거다. "조선 위안부는 사실 매춘부였다, 군인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번 경우도 있었다"고 떠들어대는 일본 우익들을 보면. '"화려한 휴가"는 정치적 음해일 뿐 사실이 아니다'는 일부 꼴통들을 보면. 베트남 참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버젓이 길가에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란 현수막을 걸어놓는것을 보면. 이쯤되면 인간 역사에 대해 '신뢰'라는 것이 가능한지 ㅡ 물론 긴, 역사를 보면 조금씩 바뀌어 왔지만 ㅡ 회의가 들곤 한다.  

김상봉 교수는 서경식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절망하는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가 도덕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철저하게 절망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도덕을 말하는 거예요. 진정으로 절망한다는 것은 도덕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도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도덕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만남 p.224)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다" ㅡ 어찌보면 당연한 것을,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하면 맘 편할것을. 물론 '도덕이 없다'는 것과,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가 양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어?"라는 비난 대신에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란 자기 성찰로 되돌아 오는 것이 성숙한 인간일 테다. 하지만 그건 피해자가 스스로 생각할 문제이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강요할 것은 단연코 아니다. 자기 반성은 모르면서 약한 피해자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비겁한 책임회피다.

김상봉 교수는 서경식 교수 책 중이 이것이 가장 맘에 든다고 한다. 도덕적 잣대의 위화감 없이 읽는이에게 공감과 책임을 이끌어 내기 때문에. 이 책의 문장들은 짤막짤막 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풍경과 역사의 흔적을 읆조린다. 자신의 회상과 레비의 일화를 적절히 섞어놓지만 고양된 감정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것이 과잉없이 딱. 끊어져 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주검이 이 언덕을 메우고 있는 걸까. 언덕은 녹음의 바다처럼 넘실거리며 저 멀리까지 이어졌다. 머리 위로 한여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매미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만주에는 매미가 없는 것일까.....온갖 무덤 앞에서 나는 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을까 하고 귀를 기울여본다. 그러나 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덤은 아무 말이 없다.(p.20~21)  
   

 사실, '재일조선인'이라는 그의 신분 때문에 - 누군가는 "잃어버린 망령이 되살아온것 같다"라고 표현했댄다. - 글에서 느낄 그 껄끄러움 때문에 서경식의 글을 의도적으로 읽지 않았었다. 나 역시 보고싶은것만 보려 했던 '평범한 악' 또는 '책임없음'의 하나였던 게다. 즉자적인 고통의 대면이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 오히려, 더 무뎌지게 만들기도 한다! - '잔혹함의 과잉'이란 핑계로 정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아 부끄럽다.

 

* 덧붙이는 말 : 이딸리아, 씨칠리아, 또리노 등 된소리가 잔뜩 들어간 창비의 외래어 표기법은 생소하기만 하다. 마치 맞춤법 갓 배우는 초등학생의 글 처럼 ㅡ 고종석은 '감염된 언어' 에서 이런 표기법의 비일관성을 비판하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소리나는대로 표기하는것이 맞다고 해도 이미 익숙해진 단어들이 새롭게 쓰여진 걸 읽고 있자니 - 개인적 취향이지만 난 된소리가 많이 들어간 단어들이 왠지 불편하다. 욕에 많이 섞인다는 편견 때문일까 - 약간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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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w2333 2008-03-0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 선생- 소년의 눈물이랑 나의 서양미술 순례 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나저나 jade님도 독서폭이 엄청 넓군요. 한의대에 이런 사람들 참 드문데....ㅎ

Jade 2008-03-06 19:41   좋아요 0 | URL
^^ 한의대 역시 사람 바보만드는 구조잖아요. 학생들이 질문하면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다" ㅎㅎ 저는 가끔 요즘 한의대 입학점수 낮아지는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