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북스의 아트북 시리즈를 읽으면서 여러 화가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이 몸담고 살았던 시대상이나 예술에 혼을 불태우며 치열하게 살았던 예술가들의 궤적을 더듬으며 미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이 싹트게 되었다. 사실 예술가들의 작품보다는 그들의 생애에 관심이 더 많았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사실 안다 하더라도 유명한 작품 몇 점 이외에는 그다지 아는 게 많지 않은 문외한이다. 아트북 시리즈는 이런 나에게 그림을 읽는 눈을 조금씩 키워주고 있을뿐 아니라 잘 알지 못하는 많은 화가들의 생애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 고마운 책이다. 이번에 접한 화가는 17세기 네델란드 미술사에 있어서 빛나는 한 획을 그은 거장 베르메르다. 베르메르는 살아생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사후 두 세기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화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베르메르라는 이름이 조금은 낯설다. 네델란드 화가하면 렘브란트가 제일 먼저 떠오르고 브뤼겔이 생각나는데 베르메르는 고작 이름만 들어본 화가에 속한다. 베르메르가 왜 낯설게 느껴졌는지는 책 후반부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베르메르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눈에 띄는 사건이나 동요 없이 비교적 조용하고 무난한 삶을 보낸 측에 속하는 화가였다. 베르메르는 네덜란드의 고요하고 청명한 도시인 델프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델프트에서 8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헤이그 여행조차 그의 연대기에서는 두드러지는 부분이니 미술사를 따로 공부하지 않은 나에게 친근할 리 없는 법. 베르메르는 모든 작품이 대표작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표지를 장식한 대표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포도주를 마시는 여인>, <디아나와 님프들> 같은 작품은 인간의 숨겨진 심리와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베일을 쓴 소녀>와 대표작 중 하나인 <포도주 잔을 든 여인>의 그림 속 여인들의 미소는 오늘날까지도 관람자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매혹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생전에 미술가나 국제적인 여행가에게서 천재적인 화가로 칭송을 받지 못했으며, 당연히 그의 작품이 천문학적 액수를 받고 팔려나가는 일도 없었다." (P114) 다작이 아니었던 베르메르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대표작이라고 할 만큼 화가의 정성과 노력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말년에 경제적인 고통을 겪으면서도 적은 수의 작품을 매우 천천히 완성 시킨 베르메르는 굶주린 11명의 자녀와 미망인, 적지 않은 부채를 남겨두고 생을 마감한다. 베르메르의 죽음 이후 가정 경제는 지탱하기 어려운 사태로 치달았고, 미망인 카타리나는 어린 자녀 11명을 남겨두고 1년 뒤 남편을 뒤따른다. 작품 전반에 그만의 스타일을 뚜렷하게 나타낸 온화한 빛의 화가 얀 베르메르가 두 세기만에 다시 자취를 드러내어 다행이다.이제 그의 이름을 렘브란트와 나란히 기억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