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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의 미궁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어느 날 눈을 떠보니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지구상에 이런 곳이 존재하리라고 상상해본 적도 없을 만큼 기이한 곳에 내가 누워 있다면? 만약 내가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떨며 옴짝달싹도 못하며 이 상황이 제발 꿈이길 바랄 것 같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엄연한 현실이라면? 기시 유스케는 [크림슨의 미궁]에서 후지키와 여덞 명의 사람을 일본과 정반대인 호주의 낯선 사막으로 데려다놓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에 휘말리게 한다.
기시 유스케의 작품은 처음이다. 기시 유스케는 일본 호러소설 대상을 수차례 수상한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많은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다. [열세번째 인격]을 읽은 지인은 작가의 예리한 시선과 세밀한 터치, 높은 완성도를 격찬하며 그의 작품을 읽어볼 것을 권하기도 해서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크림슨의 미궁]은 이런 나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차례로 읽어볼 마음까지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호주의 사막에 모여든 아홉 명은 실업자, 약물중독에 빠진 애로 만화가, 병든 육체노동자, 다중채무자, 이혼녀, 퇴직자 등 실패자들이다. 낯선 땅에서 만난 여덟 명과 후지키의 손에는 게임의 규칙을 알려주는 게임기가 들려져 있고 아홉 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게임에 임하게 된다. 게임은 단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생존게임이다. 무엇 때문에 왜 이 게임을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게임을 피할 수 있는 상황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끔찍한 게임에 임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된 게임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기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게임이 진행되면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며, 내가 이기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괴로운 상황은 참기 힘든 배고픔과 추위와 목욕을 할 수 없는 불편함보다도 훨씬 크다. 과연 생존게임의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과연 누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것인가?
작가는 극한 상황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악함과 잔인함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탄탄한 구성과 치밀한 심리적 묘사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정팬을 가지고도 남을만하다. 호주의 황무지를 배경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은 핏빛경쟁을 하는 우리 사회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