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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연일 짙은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고 마을을 뒤덮고 있다. 안개에 갇힌 산 속 마을은 축축하고 미세한 물방울에 포위당한 채 한나절이 되기를 지루하게 기다린다. 점심 무렵이 되어야 안개는 마을을 두른 팔을 풀어놓는다. 이번 주 내내 축축한 안개의 품에 안겨 있어서 그런지 기분까지 가라앉는 것 같다. 하지만 안개가 긴 날은 대체로 포근해서 좋다. 올 겨울은 안개 덕분에 유난히 포근하다.
안개마을이란 뜻을 가진 가스미초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도쿄의 한 마을이다. 아사다 지로는 [가스미초 이야기]에서 가스미초를 배경으로 한 여덞 편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들려준다. 가스미초는 주인공 이노의 유년의 기억과 고등학생 시절 추억이 깃든 그리운 마을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노가 함께 살았던 고향 마을의 가족 이야기는 어느새 내 마음을 그리운 고향으로 데려다 놓는다. 고향!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그르 돌고 아스라한 기억과 빛바랜 추억을 더듬게 만드는 단어다. 사라진 고향을 그리며 추억하는 이 책은 떠나간 사람들과 떠나온 고향을 추억하며 향수에 젖게 만든다. 고향을 떠나고 보니 길가에 심겨진 나무 한 그루, 누군가의 집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한 무더기의 장미꽃, 지금은 없어진 철둑길에서 앙감질로 뛰어놀던 소꿉친구들과 미로 같았던 좁은 골목길에서 해가 저물도록 숨박꼭질하던 친구들, 그 어느 것 하나 그립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아름다운 추억이고 그리운 얼굴들이다. 지금 볼 수 없는 얼굴들이라 더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이 책도 사라진 것들의 아름다움과 그리움을 이노를 중심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가스미초 이야기]는 표지만큼이나 아름답고 따뜻한 소설이다. 이노와 하루코의 짧고 풋풋한 사랑, 사진관을 운영하는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랑했던 노신사와 그에 읽힌 가족의 비밀, 스승인 할아버지를 위해 필름을 넣지 않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아버지, 18년 동안 삶의 순간순간을 사진으로 남겨준 할아버지와 마지막 선물이 된 소중한 졸업사진, 이노와 마치코의 안타까운 사랑 등 이노의 서툰 사랑과 이별, 가족의 끈끈한 정을 작가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뒤섞어 놓았다. 처음엔 여덟 개의 단편이 각기 다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읽다보니 한 편의 이야기로 모아진다는 걸 알았다. 할머니의 첫사랑을 가슴으로 끌어안은 할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스승이자 장인인 할아버지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만날 땐 가슴이 뻐근했다. 이 뻐근함이 글을 쓰는 동안 되살아나서 안개로 인해 축축하게 가라앉은 마음을 밀어내고 따스한 기운으로 채워지고 있는 걸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