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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이 학교 선배들과 기차를 타고 제천까지 가서 영화 <2012>를 보고 밤늦게 돌아왔다. 우리가 사는 정선이나 가까운 영월에는 영화관이 없어서 영화를 보려면 제천까지 가야하는데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녀석이 찬바람을 맞으며 먼길 다녀온 것이 궁금해 이유를 물었다. 녀석은 지구의 종말이 너무 궁금했다고 짧게 대답했다. 대답 끝에 아이는 아이는 정말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하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말해줬다. 2012년에 지구가 종말하지 않는 이유를 성경을 근거로 장황하게 설명하자 아이는 "자기가 죽는 날을 아는 게 좋은 게 아니구나" 한다. 얼핏 생각하기엔 지구든 개인이든 마지막 날을 알고 있으면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을 택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 극심하며 목을 옥죄는 고통일 것이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죽음에 대한 예언과 그 예언이 기가막히게 맞아떨어지면서 형사 톰 숀이 그 예언들을 역추적하는 이야기이다. 미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 졌다는 이 소설은 국제 스릴러 작가 협회가 선정한 최고의 스릴러 70편에 선정되었을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은 소설로 코넬 울리치의 1945년작이다. 최고의 누아르답게 책은 초반부터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어두운 도시의 밤, 강길을 걸으며 퇴근하던 숀은 우연히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한 여자를 구하게 된다.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인 진 레이드가 왜 자살을 시도했는지 숀은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진 레이드의 아버지 할란 레이드는 타려고 했던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톰 킨스는 비행기 추락사고를 예언한 인물이다. 할란은 톰 킨스의 예언이 수차례 적중하는 것을 보며 그를 신뢰하게 되고 마침내 톰 킨스에게 자신의 죽음에 관한 예언을 듣는다. "당신은 3주 안에, 정확히 자정에, 그것도 사자의 아가리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외동딸 진 레이드는 충격에 휩싸이고, 아버지 할란은 침실에 틀어박혀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몸을 떤다. 두 모녀에게 3주 후 할란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며 불변하지 않는 진리나 마찬가지다. 진은 날이 갈수록 망가지는 할란을 더는 볼 수가 없어서 급기야 자살을 택한 것이다. 진의 이야기를 들은 숀은 톰 킨스의 예언이 사실인지 조작인지 알아내기 위해 수사에 착수한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를 읽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이 죽음 이상의 두려움과 고통을 안겨 준다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이 죽는 날을 아는 것은 어쩌면 최고의 형벌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다행이다. 죽는 날을 출산일 계산하듯 한다면 지구는 공포의 도가니로 바꾸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