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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 ㅣ 샘깊은 오늘고전 10
방현희 지음, 김태헌 그림 / 알마 / 2009년 6월
평점 :
역사에 관심이 많아 역사서를 즐기는 편이지만 최부라는 이름은 낯설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보다 이름 없는 선비들의 생애에 관심이 더 많아 책을 읽다 처음 대하는 이름을 발견하면 잊지 않으려고 두 세번씩 입속으로 불러보는 습관이 있다. 그럼에도 최부는 낯선 이름이다. 어느 책에선가 그의 이름을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내 기억력은 그것을 불러오지 못했다.
최부(崔簿, 1454~1504)는 조선 성종 때 문신으로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된다.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 나주로 돌아오던 중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한다. 최부의 일행은 표류한 지 14일 만에 중국 임해현 해안까지 밀려갔고, 온갖 고초를 당하며 중국 강남 및 산둥 등지를 거쳐 북경을 통해 135일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다. 최부 일행이 중국에 체류한지 135일 만에 8,800여 리의 남북을 관통하여 단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자 성종은 그간의 상황을 정리하여 보고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최부는 일기 형식으로 그간의 일들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표해록]이다. 표류란 배가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바람과 물결에 따라 정처 없이 흘러 다니는 것을 말하고, 표해록이란 최부 일행이 명나라에 상륙한 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겪었던 온갖 고난과 위험을 겪은 기록이다.
최부의 [표해록]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세계 3대 중국 견문록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표해록]은 당시 중국 명나라의 사회 상황과 정치, 경제, 문화, 교통 군사 등을 세밀하게 기록한 문헌으로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한 '강남'지방에 관한 기록은 최부의 견문록이 최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하겠다.
최부는 해적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왜구로 몰려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심하게 매를 맞고, 쫓기는 상황에서도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지킨다. 최악의 상황, 목숨이 위태로운 절박한 상황에서도 최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조선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직하게 대처하자 중국 벼슬아치들도 그를 알아본다. 중국인들이 왜적이 아닌 진짜 조선 선비인지 알아보기 위해 최부에게 조선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최부가 막힘없이 조선의 역사와 문화 인물들에 대해 상세히 답변하자 그들은 최부의 식견에 대해 놀라 감탄하며 선물과 음식을 내놓는다. 중국인들과 필담을 나누며 조선 선비의 기상과 조선을 알린 최부의 깊은 학문과 고매한 인격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최부는 정말 자랑스러운 조상이며, 청소년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다. 처절한 고난과 목숨의 위태로움 앞에서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일행을 독려한 점, 중국 벼슬아치 앞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조선 사대부의 투철한 기상을 보여준 점, 순발력과 빠른 판단력으로 일행 43명을 모두를 살린 지도력, 깊은 학문과 뛰어난 식견으로 무장한 30대 실력가 최부를 알게해 준 이 책이 참 고맙다. 그러나 최부는 연산군의 폭정과 훈구파의 모함으로 귀양 길에 오르게 되고1504년 갑자사화 때 51세의 나이로 사형당한다. 청렴하고 정직하고 곧은 선비의 억울한 죽음은 당시 조정과 재야, 그리고 오늘의 나를 무척이나 안타깝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최부를 모르는 것도 안타깝다. 곧은 절개와 높은 인격을 갖춘 훌륭한 선비 최부가 이 책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나아가 교과서에도 실리기를 바란다.(이미 실렸다면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