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일런트 랜드 - 신경심리학자 폴 브록스의 임상 기록
폴 브록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7월
평점 :
불의의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기억력이 80분 동안만 지속되는 병에 걸린 한 천재 수학자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얼마 전에 읽었다. 이 수학 박사는 사고 나기 전 기억은 남아 있으나 사고 후에는 모든 일을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80분이 지나면 모든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덕지덕지 메모지를 옷에 달고 우스깡스런 모습으로 살아간다. 이처럼 사고나 질병으로 뇌를 다친 사람들은 기이한 행동을 보인다. 수학자처럼 기억력이 80분 동안만 지속된다든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다든가, 자신의 오장육부가 남한테 투명하게 보인다고 생각하거나, 거리 인식을 못한다던가, 자신이 죽은 사람처럼 느껴진다거나, 목 아랫부분이 모두 마비되었는데 다음 주말에 암벽등반을 계획하든가 한다.
폴 브록스의 [사일런트 랜드]는 오랫동안 신경심리학자로 일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신경장애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책은 뇌를 다친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고 증세를 살피는 3인칭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으로 묘사하고 있다.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상행동을 서술하기 때문에 환자를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이처럼 환자의 눈으로 병증을 보려는 독특한 시도를 보고 “아름다운 구상, 아름다운 집필,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칭찬한 비평가도 있다고 한다.
[사일런트 랜드]에는 신경증 환자들의 다양한 사례와 함께 저자 자신의 관점도 설명한다. 뇌를 다친 평범한 사람들의 기이한 이야기 16편을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었다. 환자들의 사례는 그 다양함 만큼이나 제각각이다. 어떤 내용은 기이하고, 어떤 사례는 슬프고, 흥미롭고, 충격적이다. 자신의 몸 일부를 절단하는 데서 쾌감을 맛보는 사람이나 공개된 곳에서 수음행위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이 책이 돋보이는 점은 단순한 임상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분히 철학적이다. 폴 브록스가 툭툭 던지는 철학적인 질문과 철학적인 문제 제기는 읽는 이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준다. 환자들의 사례에 저자의 신경학 이야기와 형이상학적 우화, 자전적 명상을 덧붙여 신경심리학과 철학을 조합한 심오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폴 브록스는 후천적인, 사고나 질병, 정신적 충격으로 뇌에 손상을 입은 신경장애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어서 건강한 독자라도 주의깊게 읽게끔 만든다. 사고는 부지불신간에 찾아오는 것이고, 한 번 다친 뇌는 치적인 결과를 가져와 본인과 가족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저자가 거듭해서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인은 언제나 잠재적 장애인이라는 구절 역시 흘려버릴 수 없었다.
뇌 손상 환자들의 이상행동, 자아, 의식, 마음 등에 눈을 돌리게 해준 책이다. 또한 뇌에 대해서, 신경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딱딱할 줄 알았던 임상 기록을 소설처럼 흥미롭게 쓴 폴 브록스를 알게 된 것도 이 책이 준 수확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