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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힘들면 연락해
김수미 지음 / 샘터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얘들아 힘들면연락해!]를 읽은 느낌은 그녀와 목욕탕에서 하루 종일 함께 보낸 기분이다. 발가벗은 몸으로 볼 데 안 볼 데를 다보고, 서로 때도 밀어주고, 밥도 같이 먹고, 낮잠도 한숨 늘어지게 자고, 깔깔대며 수다도 떨고, 은밀한 이야기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나누고 , 마지막으로 개운하게 샤워하고 나오며 아쉽게 헤어진 기분이다.
그녀의 글은 그녀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민망할 정도로 솔직대담하고 기교를 부리지 않아서 오히려 설득력이 있고 감동적이다. 마음에 품은 젊은 스님과의 겸상에서는 부끄러워 젓자락으로 깨적거리다 상을 들고 나온 부엌에서 밥을 3공기나 더 먹었다는 얘기는 배를 잡고 웃게 했고, 굵고 긴 똥을 누어 똥이 탁 걸쳐서 접힌 채 변기에 꽉 차 있는 걸 남편을 불러 보여 주면 미친년 보듯 하며 질색한다는 얘기에서 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웃었다. 아무리 털털하고 솔직하다 해도 여자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긴 어려운 법이다.
그녀는 나를 울리기도 했다. 언니는 검정 고무신 앞코가 찢어져 검정실로 꿰매고 덕지덕지 끌다시피 다니는데 그녀에겐 반들반들한 칠피구두를 사주셨던 아버지는 막내딸인 그녀한테만은 옥이야 금이야 끔찍하셨다. 빈병 팔러 왔다가 그녀가 점방 아줌마에게 지천받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큰성 결혼시킬 밑천으로 점방에 있는 구슬, 머리핀, 머리띠, 인형을 '도리'해주시고 요일마다 색을 바꿔 머리 리본을 하라고, 큰성 시집이야 한 해 늦추면 된다던 아버지셨다. 시금치 수십 가마를 판 돈을 들고 포목점으로 데리고 가 하얀 망사를 사게 하시며 일찌감치 발현된 연기의 재능을 밀어주시고 두둔하신 아버지. 당신 살점 같은 밭을 반이나 팔아서 서울로 유학보내고 군산항 칼바람에 폐렴을 얻어 고생하시면서도 그녀의 자취방에 들르시면 쑤셔박아 둔 생리대를 다 삶아 차곡차곡 개어 놓고 가시던 아버지를 그녀는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고등학교 2학년 봄에 떠나신 아버지가 미치도록 그리워 "아부지, 어떻게 하나님께 부탁드려 하루만 시난 낼 수 없으실까요?"라며 가슴절절하게 쏟아내는 그녀의 가느다란 바람은 읽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번 책으로 나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문학소녀 였다는 것, 강한 이미지와 달리 여리고 섬세한 내면의 소유자라는 것, 영화에서 내뱉은 욕지기들은 연기라기 보다는 입에 밴 생활언어였다는 것, 펑펑 울 정도로 미치게 꽃을 좋아한다는 것, 의리하나는 끝내주며 비밀을 절대로 누설하지 않는 무거움 입을 가졌다는 것, 시청이나 군청, 여성단체 등이 주체하는 교양강좌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그녀를 다시 보게 하였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내게 그녀는 연기자 김수미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그녀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어서, 발가벗은 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줘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책은 연예인들의 진면목과 그녀의 대인관계를 통해 진짜 김수미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른생활 유인촌, 생활 속의 전도사 신현준, 털털한 황신혜, 보자기로 요살을 부리는 효재와 목욕탕의 미스리, 동명이인 김수미로 들여다 본 그녀는 참 인간적이고 가슴 따뜻한 여인이다. 언제고 힘들면 기대고 싶은 언니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지금까지도 궁금한 것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스님은 어떻게 생긴 분일까? 몹시 궁금하다.
불가능하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어디라고 당장 떠나는 황신혜와 이효재처럼 나도 그녀의 여행에 한번쯤 동행하고 싶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녀의 글만큼이나 맛깔스럽고 푸짐한 음식도 목욕탕의 미스리처럼 맛나게 먹어보고 싶다. 그래도 힘들면 연락하라는 말은 희망을 가져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