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이 A
조나단 트리겔 지음, 이주혜.장인선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소년 A가 고른 이름은 평범하면서도 근사한 '잭'이다. 잭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무겁고 어두운 과거를 모두 지워내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다. 아니, 잭이 살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이름을 바꾸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출발하고 싶었다. 그래서 과거를 꾸미고 말투를 고쳐서, 든든하고 따뜻한 후원자 테리의 도움으로 새 직장과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아버지처럼 돌봐주는 테리와 직장 친구들, 그리고 처음으로 사랑하는 여인 미셸을 만나 행복한 잭은 자신의 과거가 탄로날까 두렵고 불안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도 시간이 갈수록 증폭된다.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는 다 늙어서 사회에 아무 기여도 못하는 돈 많고 인색한 노인의 돈을 똑똑하고 능력있지만 가난해서 앞길이 막힌 자신이 갖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당당하게 노인을 살해한다. 그러나 그는 살인 직후부터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순결한 영혼을 지닌 여인 소냐를 만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수한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도소로 향하는 그와 잭이 자연스레 대비된다. 잭이 용기를 내어 미셸에게 모든 것을 고백했더라면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마음이 가벼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내 마음까지 무겁게 한다. 잠을 이룰 수 없는 괴로움과 그를 짓누르는 거짓과 위선의 무게는 그의 정신까지 혼미하게 만들었다는 대목에서 진한 연민을 느낀다.
[보이 A]는 소년이 교도소에서 14년을 보내고 출소 한 이후의 삶과 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93년 영국 리버풀에서 열 살 소년들이 두 살 난 남자아이를 죽인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가해자의 심경을 중심으로 그린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소년 A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과 집단 괴롭힘,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집에서는 아버지의 의심을 받는 아이다. 그는 소년 B를 만나 어울리게 되는데 마을에서 가장 예쁜 소녀 안젤라 밀턴의 죽음에 연루되어 사회와 격리 수용된다. 소년 B는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소년 A는 14년의 복역을 마치고 세상으로 돌아온다.
언제 자신의 과거가 탄로날지 전전긍긍하는 잭의 행방을 집요하게 뒤쫓는 언론과 잭을 위험 인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를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로 인해 모든 과거사가 드러난 잭은 세상의 냉대와 돌변, 편견을 견뎌야 했다. 그토록 잃고 싶지 않은 삶과 사람들을 잃게 하고 그의 말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누구도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세상은 곧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는 우리들 말이다. 죄값을 치른 잭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 위험 인물로 바라보는 우리에겐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저자는 에둘러 묻는다. 손에 들려진 돌을 슬그머니 숨기고 꽁무니를 빼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