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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목소리 - 어느 나무의 회상록
카롤 잘베르그 지음, 하정희 옮김 / 파란시간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요즘 뒤란으로 나가는 문만 열면 밤꽃 냄새가 코를 찌른다.
뒷마당에 있는 열댓그루의 밤나무는 우리 가족의 나이를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오래된 고목이다.
동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밤나무가 모두 300년 되었다고 하는데
나무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내가 보아도 그 정도의 연륜이 느쪄진다.
해걸이를 하는 탓에 작년에는 밤을 거두지 못했으나 제작년에는 다섯 가마니의 밤을 주웠다.
올해는 밤꽃 냄새만 맡아도, 밤꽃만 올려다 봐도 밤 주울 생각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 [초록 목소리]를 읽으면서 여러번 뜨끔했다.
이 책은 2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온 나무가 그동안 보고, 듣고, 겪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와 자연의 변화를 직접 들려준다.
초록 나무는 오랜 세월 지켜본 사람들의 이야기와 자연 이야기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내가 뜨끔했던 부분은 자신이 소중하게 맺은 열매를 사람들이 함부로 따가고, 당연한 듯 따간다는 나무의 이야기에서다.
지난 일주일간 아침 저녁으로 뽕나무 열매를 땄다.
그런데 높은 곳에 달린 오디를 따려고 가지를 휘어잡고 앞으로 바싹 당겨서 따다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그만 가지를 찢고 말았다.
나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찢어진 가지를 붙일 수도, 그렇다고 자를 수도 없어 그냥 내버려뒀는데 나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오디를 당연히 내 것인 양 따면서도 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때가 되어 열매를 맺은 거라 생각했고 그것을 내것인양 마구 땄으나
이 책은 열매를 맺기까지 나무가 들인 노력을 알려주며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초록 나무의 당부처럼 뽕나무의 고마움을 두고두고 기억해야겠다.
[초록 목소리]는 어린 나무 시절을 회상하며 한 농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무는 풍족하진 않았지만 단란했던 가정이 아버지의 과욕으로 가족 전체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슬픈 광경을 보고,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가 집단이성에 거부당하는 고통을 지켜보기도 하고,
한 남자와 남자의 처절한 사랑의 목격자가 되기도 하고,
은밀한 사랑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돌아온 군인의 몸부림을 보기도 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나무의 목소리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무자비함, 욕심을 읽었다.
온갖 군상들의 격렬하고 힘겨운 삶과 자연을 훼손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나무는 인간에게 할말이 많을 것이다.
나무가 들려준 말 중 폐부를 찌른 말이 있다.
"소란을 잠재우려고 더 큰 소리를 지르고,
낙서를 방지하려고 더 지저분한 낙서를 하고,
나무를 보호하자며 더 많은 나무를 베어내서 알리고,
죽어가는 강을 살리자며 강 바닥을 파헤친 후 둘레에 콘크리트 옹벽을 치고,
몇몇 전쟁을 막는다며 더 큰 전쟁을 일으키고,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겠다며 더 많은 이들을 죽인다."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고,
친환경 제품을 선호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으면서
정작 자연을 훼손하고 함부로 대하는 우리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사는 모습이나, 생각하는 마음이 모두 자연을 닮았으면 좋겠다.
이기심도, 무자비함도, 욕심도 줄어들어 자연처럼 순수해지길 바라는 게 비현실적일테지만.
초록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우리의 자명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