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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에 달 뜨면
백동호 지음 / 밝은세상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인간은 누구나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이 어쩐지 새삼스럽고 거북하지만 꼭 해야 될 것 같다.
더욱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병에 걸린 환자라면 존중과 함께 보호받을 권리까지 있다고 덧붙이고 싶다.
소설 속 소록도 나환자들은 존중이나 보호는 커녕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힌,
인간이 받을 수 있는 학대와 고통, 탄압의 극한을 체험하다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어갔다.
아우슈비츠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은 대학살이 일제에 의해 소록도에서 자행되었다.
숨도 못 쉴 만큼 끔찍한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인간 대우를 못받고 생체실험을 위해 희생된 소록도 나환자들의 죽음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장 끔찍하고 처참한 비극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이 비극을 부끄러운 치부로 숨기려 하고 일본 정부는 보상을 피하려 한다.
누가 저들의 억울하고 한맺힌 죽음을 풀어줄 수 있을까.
[보리밭에 달 뜨면]은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지상에서 가장 끔찍한 학살을 고발하는 소설이다.
신문기사, 참고문헌, 관련자 증언, 시대적 상황 등의 씨줄과 작가의 분석과 상상력이 날줄이 되어
소록도에서 자행된 일제의 생체실험을 역사의 진실로 매듭지은 소설이다.
영화 실미도의 원작가인 백동호 저자는 10여 년의 시간 동안 관련 자료와 증언을 통해
정보를 모아 철저한 사실에 근거해 [보리밭에 달 뜨면]을 썼다고 밝힌다.
소설은 주인공 한상혁이 교도소 안에서 정채환에게 소록도의 실상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상혁은 부잣집의 귀한 외아들이나 소학교 5학년 때 나병 진단을 받고
다락방에 숨어 지내다 나환자들의 치료와 낙원 건설이라는 속임수에 넘어가 스스로 소록도로 찾아가고
훗날 탈출에 성공한 인물이다.
일제는 생화학무기 개발을 위해 731부대를 창설하고 생체실험을 계획한다.
731부대에서 생체실험 교육을 이수하고 소록도에 파견된 오사카는 나환자를 대상으로 파상풍균과 괴저균을 연구한다.
일제는 나환자 낙원 건설과 자력갱생이라는 감언이설로 전국의 나환자들을 소록도로 불러들인다.
갖가지 생체실험을 위해 나환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환자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강도 높은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단 일초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은 엄격한 통제 속에 놓이게 되고,
생체실험용으로 활용되다가 끔찍하게 비명횡사한다.
이러한 생체실험은 해방 때까지 이어졌는데 생체실험을 진두지휘한 소록도갱생원의 수호 원장이
나환자들을 위해 불철주야 헌신했다는 공로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러니 이춘상이 수호 원장을 시해하는 장면이 얼마나 통쾌했겠는가.
인간이 얼마큼 잔인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원한 맺힌 저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 해서 괴로웠다.
저들을 신원해 줄 힘이 나에게, 우리나라에 없음이 안타까웠다.
감금실에서 벌어진 갖가지 생체실험은
너무나 처참해서 책을 여러번 덮게 만들고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이 책은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소설이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에 근거한 기록이다.
독일처럼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보상하기 전까지 만행을 저지른 일본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본,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나라이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