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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뜬 거울
최학 지음 / 문예사조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다 자연에 살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길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숲속에 여린 새싹이 딱딱한 땅을 헤집고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봄이나
만산 홍엽으로 물들인 가을날 산새들의 노랫소리 들으며 호젓하게 오솔길을 걷다보면 시를 쓰고 싶은 충동이 물밀듯 밀려온다.
이 아름답고 오묘한 자연을 시로 노래하고 싶어 끄적거려보지만 이내 포기하고 만다.
시상을 펜으로 옮기려고 하면 아득해지기 때문이다.
시인은 따로 있나 보다.
[바다에 뜬 거울]은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를 읽은 후 두번째 만나는 저자의 작품이다.
첫 만남에서 받은 인상이 강렬해서 저자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분명한 편이다.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월남 전쟁 이야기는 숨죽이면서 읽었고,
기계치에 대한 이야기는 깔깔거리며 읽었던 터라 시집 또한 기대에 부풀어 펼쳤다.
[바다에 뜬 거울]은 서정성 짙은 110편의 시를 담고 있는 시집이다.
이 책은 저자의 둘째 아들 결혼을 기념하는 뜻으로 발간되었다고 한다.
아들 부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기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녹아있는 이 시집은 내 취향에 딱 맞는 시들로 빼곡하다.
책에 실린 시들은 전체적으로 군살을 과감히 제거한 듯 단촐하며 산뜻하다.
화려한 치장도 거부하고, 요란한 장식도 마다하고, 필요하고 적절한 시어들이 시를 빛나게 한다.
감정의 절제가 그윽함을 선사하고, 여백의 미가 애틋함을 안겨주고, 군더더기 없는 글이 단아함을 더해준다.
군인의 시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서정적이고 부드러움을 지닌 시들이 많아 읽는 이의 마음을 아름답게 물들여준다.
제목이 된 '바다에 뜬 거울'은 어둠이 내린 밤바다의 수면을 거울에 비유하고
수면위의 반짝이는 빛이 파도와 함께 바다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을 쓸쓸하게 노래한다.
밤바다의 수면을 까만 융단 빛 거울에 표현한 것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 한마디'는 서울시 문화 위원회에 선정되어 지하철역에 걸린 시이기도 하다.
시인은 바다를 노래하고 호수를 노래하며 노을과 겨울 나무, 가을 밤과 동굴 등 자연을 노래한다.
산사의 종소리와 어머니, 고향, 조약돌, 빈집 등을 등장시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토방과 사립문 툇마루와 물레방앗간으로 옛스러운 멋을 한껏 풍긴다.
시인의 세계엔 고요함과 활기가 공존하고, 쓸쓸함과 즐거움이 교차하고, 그리움과 아름다움, 자연과 사물이 섞여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듯, 말을 아끼는 듯, 평범한 듯한 시인의 시는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빈 집이 늘어가는 시골 풍경의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잘 묘사한 '빈 집'을 소개하며 서평을 마친다.
빈 집
임자 없는 사립문
검게 물든 문설주
장독대의 봉선화, 민들레는
외로움이 싫어 풀숲에 숨고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토방의 신발은
온 몸이 부르트고
툇마루에 늙은 뒤주는
입 다문 채 말을 잃었다.
비바람 쌓여
투박해진 마당에
고양이가
빈 하늘만 낚고
날마다 어둠이 내려도
주인은 돌아오지 않고
방에는 빛바랜 체취만이
빈집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