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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신진혜 지음 / 창해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역사책은 좋아하지만 역사소설은 그다지 즐겨읽는 편은 아니다.
역사소설은 객관적 사실보다는 흥미위주로 흐르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책이 아니면 읽지 않는다.
역사소설이 역사적 기록과 실존인물을 기반으로 하지만 소설적 상상력이 가미된 작품이라는 것이 자칫 역사 왜곡을
부를 소지가 높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을 주인공으로한 드라마가 곧 방영된다는 소식과 함께 선덕여왕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이 갑자기 쏟아지고 있다.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선덕여왕에 대한 책을 기다렸기 때문이며 선덕여왕 이라면 내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남한산성]과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에 이은 내가 읽은 세번째 역사소설이다.
선덕여왕에 대한 내 사전지식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라는 것과 설화 속에 등장하는 여인,
통일 시대를 연 인물이라는 것이 전부이다. 선덕여왕에 대해 아는 것이 적어서 오히려 책에 몰입할 수 있었다.
[선덕여왕]은 선덕여왕의 일대기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그려낸 장편 역사소설이다.
책은 덕만공주라는 소녀에서 여왕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 그 이후의 치세를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선덕여왕을 여왕이기 이전에 한 여인으로 겪어야 했던 슬픔과 고뇌와 기쁨,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쓰고 있다.
선덕여왕은 남성의 권력이 강화된 시대에 왕이 된 여인이다.
그것도 언니인 천명공주에 이어 차녀로 태어난 몸으로 장녀를 제치고 왕이 된 여인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출생은 화려하지 않다.
덕만공주(선덕여왕)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존재감이 없이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나던 날 신라의 모든 절에서 왕자의 무사탄생을 기원하는 법회가 열렸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모든 기대를 한순간에 저버리고 여자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 그 아일 보지 않겠어. 내가 품었던 열 달간의 희망을 절망으로 갚은 그 아이를 위해 절대 젖을 물리지 않겠어."
부모에게조차 덕만은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덕만공주는 슬퍼하지 않는다.
덕만은 쾌활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궁궐밖 백성들의 삶과 궁궐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수시로 무단 출궁을 감행한다.
덕만의 무단 출궁의 동행자는 궁궐생활에 염증을 느낀 비형이고 두 사람의 가슴엔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덕만은 유약한 천명공주가 부군의 자리를 내놓자 왕위 계승권자가 된다.
이는 스승 원광법사와 아버지 진평왕, 그리고 미실궁주가 바라는 일이었지만 덕만 스스로도 이 일을 멋지게 받아들인다.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란꽃의 향기를 두고 미실과 한 내기가 그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그림만 보고도 향기가 없는 꽃인 걸 알았을까, 직접 묻고 싶다.
한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은 그녀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접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덕만을 사랑한 용춘이나,
운명처럼 빗겨간 슬픈 사랑의 주인공 비형이나,
일상의 자잘한 행복을 포기하고 국모로 살아가야 하는 덕만이나 모두 용기의 사람들이고, 사랑의 사람들이다.
미실궁주가 덕만공주에게 "만약 그대가 제왕으로서 이 땅에 선다면 무엇을 위한 기반을 닦고 싶소?" 라고 물었을 때
"덕만은 눈물이 흐르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살아갈 것 같습니다." 라고 한 말은
그녀의 제왕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장면이다.
같은 질문에 언니 천명공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천명공주의 그릇은 왕이기 보다는 김춘추라는 왕의 어머니에 만족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두 공주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 미실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여왕 탄생의 옥토를 닦은 인물이며,
제왕들을 치마폭에 두고 정계를 주무르던 여걸이다.
미실에 관한 책도 꼭 읽어볼 참이다.
선덕여왕은 역신들까지 껴안은 여왕이다.
역신을 가리켜 신라의 백성, 나의 자식들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 선덕여왕은 진정한 나라의 어머니이다.
나에게 그녀는 삼국통일을 꿈꾸며 화려한 통일 시대를 연 여왕, 약소국 신라와 가난한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정치적인
면보다는 한 여자로 가까이 다가온다.
한겨울에도 문을 열고 밤하늘의 별을 보기 좋아했던 그녀,
무술을 좋아했고 자유를 꿈꾸었던 여인,
권력보다는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여인으로 그녀가 다가온다.
그래서 그녀가 좋고, 그녀를 소개해준 이 책이 좋다.
[선덩여왕]은 어린(?) 작가의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구성과 스토리가 탄탄하다.
작가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작품을 위해 고심하며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좋은 작품으로 역사 속 위대한 인물을, 잊혀져가는 인물을 복원시켜준 작가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