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못 된 세자들 표정있는 역사 9
함규진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대중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게 두어가지 있다.

첫째는 대중들에게 역사의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작가들에 대한 고마움'이다.

대중 역사서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많은 역사는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대중 역사서를 집필하는 작가들에 의해 잠자던 역사와 역사 속 사건과 인물들이 재조명되고, 재평가되고, 복원되고,

이면이 파헤쳐지며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

부끄럽든 자랑스럽든 그것은 분명한 우리의 역사다.

역사를 모르는 것은 뿌리를 모르고 근본을 모르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가르친다고 한다.

소수 민족이며 국민 다수가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이지만 그들의 조국 사랑과 단결력은 어느 민족에게 뒤지지 않는다.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조국 이스라엘로 몰려 들어온다.

그들의 결집력은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가르친 데 기인하는 것이다.

딱딱하고 지루한 역사를 알기 쉽고, 재미있고, 유익하게 각색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많은 대중 역사서 작가들도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이며, 그래서 고맙다.

 

둘째는 작품에 대한 '작가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번뜩이는 주제와 탄탄한 고증을 근거로 다양한 내용의 대중 역사서가 끊임없이 독자들을 부른다.

왕을 낳은 후궁을 모아놓은 책이 있는가 하면, 살해당한 왕들과 선비들만 모아놓는 책이 있고,

유배를 갔던 선비들만 소개하는 책, 경제학자들을 모아놓은 책, 욍비들만 모아놓은 책, 역모사건을 다룬 책,

굵직한 연애사건만 소개하는 책, 왕들과 그들의 참모들을 엮어놓은 책, 라이벌, 천재, 적, 베일에 싸인 사건, 심리분석까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로 묻혀있던 역사를 발굴해낸다.

이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막힌 소재를 시대와 인물과 사건을 한 줄로 꿰어 발빠르게 독자들에게 선보여야 하는 작업이다.

그 꿰미에 고증과 각종 문헌과 방대한 사료를 함께 엮어야 하는 힘든 작업이지만,

자신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면 작가에겐 고단한 여정이 더없는 보람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이 책 역시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책이다.

[왕이 못 된 세자들]은 불행했던 남자들의 이야기다.

조선 왕조 519년 역사에 27명의 왕과 27명의 세자가 있었지만 이 중 15명만 왕좌에 올랐다.

이 책은 권좌에 오르지 못한 열두 세자들의 슬프고 안타까운 인생과 왕이 되지 못한 이유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국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후계자로  온 세상을 약속받은 몸이었으나 불행하게도 왕이 되지 못했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은 무슨 이유로든 죽어야만 하는, 죽어줘야만 하는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누구는 병으로, 어떤이는 광기로, 혹은 의문사로, 혹은 부자간의 권력다툼으로, 더러는 외척이나 당파에 의해 스러져갔다.

 

문치주의를 지향했던 조선에서 왕은 정치인이면서 학문에 정진해야 한다.

세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왕은 정무를 핑계로 게을리 할 수도 있었지만 세자는 게을리할 구실도 없는 신세다.

세자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세자시강원에서 복잡한 예절교육을 익히고, 학문을 닦으며, 도덕을 배워야 한다.

하루 3번의 유교 경전 공부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부왕을 보좌하는 역할로 조회에 배석하고, 각종 예식과 연회에 참석해 의식을 이끌어야 한다.

세자의 학문 성취는 왕과 대소신료들의 주요한 관심대상이어서 공부가 조금이라도 미진하다 싶으면

신하들과 유생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이를 시정하시라”는 상소가 빗발친다.

활쏘기, 말타기 등 무예에 관심을 보여도 안 된다.

 

피끓는 청춘이 일체의 사적인 행동을 누르며 세자로만 살아가라는 것은 잔인한 주문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조선의 세자들은 대체로 불행하고 우울했다고 한다.

게다가 세자의 자리를 위협하고 견제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도 이들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
왕의 아들이기 전에 권력의 2인자로 살아야 했기에 늘 몸가짐에 조심스러웠지만 비극은 자주 발생했다.

세자 비극의 시초는 조선왕조 최초의 세자 의안대군 이방석이 17세 어린 나이에 이복형의 칼에 목숨을 잃는 것으로 시작한다.

태조의 편애가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쟁의 참극을 부른 것이다.

권력욕은 혈육간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는다.

 

[왕이 못 된 세자들]은 충녕대군을 험담하는 양녕의 모습과 양녕의 비행을 소문내는 충녕의 장인 심온의 모습을 보여주며
500년 전의 진실을 묻는다. 양녕이 일부러 미친척하며 일탈행동을 일삼이 폐세자가 된 것을 정설로 받아들였는데,

저자는 그것이 정말일까? 라고 묻는다. 또한  뒤주에 갇혀 죽은 것으로 알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른 각도로 분석한다.

헤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조작이라고 읽은 일전의 책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라 좀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같은 사건을 놓고 견해가 다른 책을 만나면 나는 어지럽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 나로선 확안할 방법이 없으니.

 

아버지 인조의 심한 경계와 의심으로 의문사한 소현세자,

건강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자신을 채찍했던 효명세자,

'천재'를 본받을 것을 강요당한 순회세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등을 소개한다.

조선의 세자가 볼모가 된 것은 조선의 마지막 세자 영친왕과 소현세자뿐인데

두 세자를 모두 다루고 있어서 비교하며 읽을 수 있어 유익했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이 더했던 인물은 효명세자와 순회세자, 조선 최후의 세자 영친왕이다.

효명세자의 죽음은 세도정치 시대를 청산할 마지막 희망의 무산인데다 암살 의혹까지 있어서 안타깝다.

신나게 뛰어 놀아야 할 나이에 친구 하나도 없이 나이 든 어른들과 글공부하며 천재가 되라는 주문에 스트레스 받았을 순회세자 역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실력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동과 예능, 친구와 놀이를 통해 인성과 감성을 기르는 것도 중요한데 오로지 성리학 공부에만 매달리게 한 조선의 세자제도가 답답하다. 

11살 나이에 강제로 일본에 보내져 일본 황족과 결혼한 영친왕이 주는 안타까움도 빠뜨릴 수 없다.

영친왕은 일본의 집 안에 작은 종묘를 꾸며놓고 제사를 지내고 혼자서 한국말 연습을 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으나 슬프게도 오늘날 아무도 그를 조선 제28대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57년 만에 영친왕이 겨우 귀국하였지만  이미 반신불수에 실어증에 걸린 상태였다.

"조선의 마지막 세자는 7년간 병원에서 ‘고국생활'을 보내다 조용히 숨을 거뒀다.

조선 왕조의 세자이면서 일본 황실의 일원이었던 그의 모호한 정체성이야말로 이 남자가 겪어야 했던 비극의 결정체였다."

 

불행했던 세자들의 불행한 삶은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조선의 불행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발견했다.

연산군의 죄 때문에 그 아들은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고 인조반정과 연루된 이 일은 다시 소현세자의 비극을,

소현세자의 독살은 효종과 현종의 비극을 불렀고, 사도세자의 죽음은 여러 후손들의 비극을 불러왔다.

개인의 불행이 국가의 불행으로 이어진 것은 조선왕조 역사에서 마침표를 찍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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