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굴장으로 - 제139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시공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채굴장으로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 권남희 옮김
시공사 2009.04.01
펑점


대문과 담장이 없는 우리집은 키 작은 앵두나무가 대문과 담장 역할을 한다.

집 주변을 삥 둘러 에워싸고 앞마당에 나란히 줄지어 있는 앵두나무는 우리집의 예쁜 울타리이다. 

봄햇살을 담뿍 받은 앞마당 앵두나무에 지금 앵두꽃이 만발하다.

뒤란의 앵두나무는 연초록의 몽우리를 맺고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다.

앵두꽃은 멀리서 보면 분홍색이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신기하게도 흰색이다.

앵두꽃은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향기 없이 잔잔하게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나는 [채굴장으로]를 앵두꽃 같은 소설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파격적인 주제를 섬세하고 잔잔한 아름다움으로 그린 소설이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흠모하는 '불륜'이 이 책의 외피다.

작가 이노우에 아레노는 불륜하면 떠오르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들은 걷어내고 싱겁고 덤덤하게,

그러나 애틋하고 감미롭게 작품을 채워 나간다. 

강한 냄새 진동할 것 같았으나 아무 냄새도 풍기지 않는 무취의 소설이다.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는 유부녀의 마음이 분홍과 흰색을 오갈 뿐 이렇다할 사건 하나 없는 밋밋한 소설이지만,

심리묘사가 뛰어나고 감정의 결이 부드러워 그 맛에 취하게 된다.

 

외딴섬 초등학교 양호교사인 주인공은 음악 교사로 부임해온 이사와에게 한없이 끌린다.

주인공 세이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다른 남자에게 자꾸 시선이 가고 끌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저자는 흔들리는 주인공의 여린 마음을 포착해 한 결 한 결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 느낌이 맑다.

그 감정이 안타깝도록 치밀해서 애절하고, 선정적이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아서 긴장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랑, 자기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이 증폭되는 감정을 절제하고 누르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머리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끝간데 없이 가는 게 사랑의 마음이다.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사랑,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사랑이라서 어쩌면 더 애틋한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결혼한 사람의 가슴에도 다른 사랑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

심장이 멎지 않는 한 누구나 예외일 수 없다.

다만 그것을 절제하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채굴장으로]는 남자를 향한 그 감정이 사랑이라고 단정짓지 않고 말을 아낀다.

남자도 여자에 대해 같은 감정을 품고 있는지,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행간을 통해 추측할 따름이다.

주인공의 감정을 불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뜨거운 포옹은 커녕 손 한번 잡지 않았으니 도리질할 사람도 있을테고,

이미 마음을 빼앗겼으니 불륜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게다.

나는? 나도 단정짓기 어려워 말을 아끼련다.


[채굴장으로]의 채굴장(切羽)은 본래 갱도의 맨 끝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이상 앞으로는 나아갈 수 없는 장소를 뜻한다.

채굴장으로’라는 제목을 액면 그대로만 해석하면 뭔가 ‘막장’으로 치닫는 분위기를 연상 할 수 있다.

그러나 채굴장은 ‘날개를 자르다’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끌림과 그것을 접는 마음의 애절함을 동시에 담고 있는 제목이다.

언제나 절박한 채굴장에 선 마음,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모든 사랑의 현장일 것이다.

 

작가는 젊은 시절에 소설가인 아버지의 글을 옮겨 적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응축되어 온,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이 책을 탄생하게 했다고 한다.

[채굴장으로]는 '탄탄한 구성과, 프로의 문체, 어른의 소설, 고급스런 작품' 이라는 평을 받고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나에겐 일본 연애 소설에 가졌던 편협한 시각을 새롭게 만들어준 책, 일본 연애 소설도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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