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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의 개 -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인생의 황금기를 고도 성장하는 일본을 떠나 원시의 자연 속으로 들어간 후지와라 신야를 이틀에 걸쳐 만났다.
막연한 인도여행을 꿈꿨던 나에게 그는 보란듯이 다디던 대학을 중퇴하고 인도를 선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결단과 용기를 흉내낼 수조차 없었던 나의 나약했던 20대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돌이켜 보니 그때 나는 아무런 시도도 못하고 주저하고 망설인 겁쟁이였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인도를 여행한 저자에게 듣는 인도는 한마디로 낯섦이며 충격이다.
이제껏 내가 알고 있던 인도와 다른 낯선 인도를 저자는 가감없이 담담하게 들려준다.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고 가졌던 환상과 낭만이 절반쯤 무너졌다고나 할까.
그랬다.
갠지스 강의 화장터에서 시체를 불태우는 장면은 후자와라 신야처럼 내게도 충격이다.
그리고 화장터 주변을 배회하던 들개들이 불탄 시체를 뜯어 먹는 장면, 이 광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인도 사람들,
화장터 주변에서 벌어지는 결혼식 행렬, 후지와라 신야를 먹잇감으로 알고 달려드는 개떼들,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목숨이 지구보다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쓰레기 소각하듯 시체를 태우는 것을 보고,
화장터를 지나는 떠들썩한 결혼식 축하 행렬을 보고 그는 깨닫는다. 죽음과 삶을 경계 지을 수 없다고.
또한 인간의 목숨이 다른 생물의 먹이삼이 될 수도 있다는 발견은 그의 삶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후지와라 신야는 여행을 선택한 이유 같은 없다고 말하지만 여행의 목적만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내부를 비우고 세계의 정보를 새롭게 담아내기 위해서,자신이 살아 있다는,
존재하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감각을 되찾고 싶어서, 리얼리티를 회복하기 위해 인도로 눈을 돌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도 여행은 '신체'와 깊은 연관이 있더고 덧붙인다.
20대 초반에 신체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저자가 인도를 방문한 것처럼
힌두교에서 파생된 사이비 종교 집단인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도 같은 이유로 인도를 방문한다.
두 사람에겐 인도 방문 외에 신체적인 불안감 이라는 공통 항목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사하라는 어렸을 때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상살했고, 오른쪽 눈은 약시이다.
아사하라의 신체적 결함의 원인은 마나마타의 수은에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사회와 체제를 향한 원한은 타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와 증오를 분출하게 했고 급기야 1995년 옴진리교 가스 테러 사건을 몰로왔다. 한 사람의 신체적 결함이 몰고 온 파장을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지만, 아사하라를 그렇게 만든 사회와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는 1960년대 이후 아시아 최고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이 현대 사회에 남긴 병폐 중 하나이다.
옴진리교 신도들은 창문이 가려진 건물에서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어두 컴컴한 지하실의 밀폐된 방에서 외부와 차단된 생활을 했다. 저자는 스스로 어두운 세계에 갇히려고 했던 원인을 아사하라의 신체적 병리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종의 굴절된 자기보복 현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한다.
옴진리교 특징인 현실에 대한 자폐성은 아사하라 개인의 신체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나
이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도시의 평범한 청소년들이 너무나 쉽게 옴진리교에 빠져들고 그 어둠의 도가니에서 열광적인 정열을 발산한다.
이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의 내면에도 현실 사회에 대한 자폐성이 껄려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컴퓨터와 텔레비전이 친구인 세대들이 겪는 고독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게 없다.
자연이나 외부의 풍경보다는 가상공간에 익숙하고 그것들과 친한 청년과의 인텨뷰에서 저자는 인도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준다.
현대 문명에 괴리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청년에게 그는 재생과 갱생을 위한 파괴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재생과 갱생을 위한 파괴'는 일본인들의 지혜를 엿보는 대목이다.
같은 이유로 동일한 나라를 방문한 두 사람의 판이하게 다른 인생은 결국 '선택'에 있다고 나는 결론 짓고 싶다.
몰매를 맞으면서도 종교 의식을 거부하기로 선택한 저자의 선택과 힌두교를 선택한 아사하라의 선택은
같은 인도를 방문하고, 같은 장소를 가고, 같은 경험을 하지만 결국 동상이몽을 한 것이다.
저자의 선택은 삶이고, 아사하라의 선택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황천의 개]는 이야기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해준다.
여행서라기 보다는 가벼운 철학서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어서 그렇다.
살아 있는 존재감이 사라지는 날이나, 등 떠밀려 사는 기분이 드는 날 이 책을 다시 펼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