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유배는 조선시대에 주로 정치범들이 받는 형벌 가운데 하나이다.

유배하면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낸 조선 중기 시인 고산 윤선도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전남 완도의 보길도와 해남은 조선시가에서 정철과 쌍벽을 이룬 윤선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외국의 경우는 워털루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고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은 나폴레옹이 떠오른다.

나폴레옹은 군사와 정치적인 면에서 천재로 평가되며 알렉산드로스대황 카이사르와 비견되는 인물이다.

 

불운하고 한많거나 격동의 삶을 살다간 이들의 사연을 간직한 유배지는

그곳을 찾는 이에게 유배자의 외로움과 그리움까지 안겨준다.

유배지에서 그들이 얼마나 모질고 혹독한 시련을 견뎠는지,

얼나마 고독하고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했는지를 느끼며 자기 자신을 다진다면 다른 관광지보다 값진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내가 만난 유배자와 유배지는 이제까지 알아왔고 보아왔던 유배의 개념과 확실하게 다르다.

우선 유배자가 호텔에서 묵을 수 있고, 밥을 식당에서 사먹을 수 있으며,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호텔도 자기가 원하는 곳을 선택할 수 있으며, 본인이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직업을 갖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창녀촌까지 드나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단, 아침 저녁으로 파출소에 가서 유배지역을 탈출하지 않았다는 서명을 반드시 해야 된다.

이런 식의 유배라면 얼마든지(?) 즐기고 누리며 기쁘게 생활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우리 조상들이 외부와 단절된 고통스럽고 외롭고 비극적인 유배 생활과 너무 비교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터키의 대표작가 아지즈 네신이 1947년 터키 부르사에서의 유배 생활 이야기를 엮은

자전소설이다.

그는 계엄령 하에서도 정권의 언론 탄압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국민 작가이다.

네신은 현대판 제국주의가 터키를 장식하는 시점에서 시민을 각성시키기 위해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제작했다가

인쇄소를 급습한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로 보내진다.

교도소의 형기를 마친 뒤 네신의 유배 생활이 시작 되는데,

소도시 부르사에서 그는 소심하고 비굴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온갖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네신이 만난 인간 군상들은 비겁한 겁쟁이에서부터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약삭빠른 시인 사장까지 골고루 등장한다.

작가는 소설가보다 더 감동적인 소설을 쓰는 화류계 여인들,

자칭 원칙주의자인 교활한 화가,

네신을 보고 도망가는 옛친구들 등이 엮어내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담하게 전한다.

배고프고 춥고 가난한 유배 생활이지만 네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보다 네신이 더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람임을 확인했다.

최소한 네신은 비굴하지 않으며, 남을 속이거나, 남의 돈을 가로채지 않으며, 책임 때문에 안간힘 쓰지 않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안면 몰수를 안 해도 되었다.

비록 죄인(?)의 몸이지만 떳떳하고 당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유머가 배어있고 여유와 도량이 묻어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넓고 큰 남자이며 신념이 강하고 긍정적인 작가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민 작가를 떠나 한 남자로도 괜찮은 남자를 만날 수 있어 기분 좋다.

궁핍하고 초라한 유배의 일상을 재치 있는 위트와 날카로운 풍자로 독자에게 웃음을 주는 저자가 근사하다.

그러나 네신은 그 웃음 끝의 씁쓸함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아니 독자들이 그것을 발견하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씁쓸한 웃음을 거둬내고  활짝 웃는 세상을 우리가 일궈가도록 저자가 유도하는 장치인것 같다.

그 지름길을 저자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에서 찾도록 알려준다.

요즘 우리에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인생에서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는 것을 저자는 아주 오래 전에 간파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