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센트 1 Medusa Collection 7
제프 롱 지음, 최필원 옮김 / 시작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학교 다닐 때는 공포영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공포영화는 엄두도 못내고

연예인들의 공포 체험담도 듣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아졌다.

텔레비전에 나온 연예인들의 공포 체험담을 듣는 날에는 밤에 잠을 못잔다.

이렇게 겁이 많고 무서움을 잘 타는 내가 산속에 살고 있는 게 신기하다.

마을 맨마지막 집인 우리집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사방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2km정도를 내려가야 아랫집이 나온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산골, 해가 지면 순식간에 칠흑같은 어둠이 깔리는 산속,

이곳에서 별로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디센트]를 읽는 나흘간 정말 무서웠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까지도.

얼마나 무서웠으면 어젯밤 남편과 함께 보일러에 나무를 넣고 오다가 시커먼 물체가 휙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심장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너무 무서우니까 '악'하고 소리도 못지르고 심장과 함께 나의 두 발도 그냥 그 자리에 멈춰섰다.

시커먼 물체는 바로 내 그림자, 내 그림자에 내가 놀란 것이다.ㅠ

 

[디센트]는 희말라야 산을 등반하다 아이크와 일행이 폭풍을 피하기 위해 동굴에 들어간 이야기로 시작된다.

책의 첫번째 에피소드인 <아이크>는 죽어서 가는 지옥이 아닌 살아서 가는 지옥을 보여준다.

내가 상상한 지옥은 고통스럽고 징그럽고 불길이 치솟는 지옥이었으나 작가가 보여주는 지옥 세계는 너무나 끔찍한 살인장이다.

그 캄캄하고 음침한 세계에서 실제로 일행 모두가 누군가에 의해 끔찍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좀 엉뚱하긴 하지만,

마을에 있는 많은 동굴들이, 특히 내가 자주 이용하는 동굴이 떠올랐다.

읍내에 가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출근을 하고, 교회에 가려면 그 흔한 전등 하나 없는 깜깜한 그 동굴을 통과해야 한다.

적어도 일주일에 서너번은 이용하는 그 동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좁고 어두운 동굴로 지난번 kbs의 [스폰지]에서 촬영해 가기도 했던 아주 음침하고 캄캄한 동굴이다.

동굴 여기저기에 난 길이며 깜깜하고 습하고 음산한 것이 피신하려다 죽음을 맞게 한 그 동굴과 많이 닮아서

이젠 그 동굴을 혼자서는 못갈 것 같다.

 

<앨리>를 읽으면서 <아이크>와 줄거리가 이어지지 않아서 단편인 줄 알고 앞표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나는 앨리를 싫어하는 원주민을 마을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에게 내려보냈다는 소녀의 말과

소녀가 선물한 목걸이는 그 남자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에서, 

<브랜치>에서는 부조종사의 끔찍한 죽음에서 세 편 이야기의 희미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아이크와 앨리와 브랜치는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중심 인물이다.

 

 

서정적이고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에 길들여진 나에게

이 책은 공상 과학 소설의 묘미와 긴장감을 제대로 보여준다.

저자의 놀라운 상상력과 큰 스케일, 지적인 부분까지 두루 갖춰 SF에 대한 어설픈 편견을 제거해 주었다.

제프 롱은 지하 세계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보면서 이야기하듯 세밀하고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자세한 묘사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저자의 이력 때문일 테지만 사실 그의 묘사를 눈에 그리기는 쉽지 않다.

너무 자세한 탓일까, 내 부족한 상상력 때문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 안의 또 다른 은밀하고 깊은 지하 세계에 존재하는 '헤이들'의 끔찍하고 흉악한 살인과

흉측스런 헤이들의 모습은 또렷이 새겨졌다.

땅 속 제국을 건설하려는 헬리오스의 음모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지배욕에 도리질을 치게 만든다.

혹자는 팩션이라고 하고 더러는 픽션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픽션에 가깝다고 본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할 만한 사료나 실존 인물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허구이긴 하나 읽다보면 허구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만큼 재미와 긴장감을 주는 최고의 소설이다.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방대한 지식이 든든히 받쳐주고 리얼한 묘사가 책을 돋보이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