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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타라
조정은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에세이는 주로 작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나 사유를 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가에 대해 알게된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가 에세이를 출간하면 망설이지 않는다.
에세이 한 권으로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보다 작가에 대해 훨씬 많이 알게 되니까.
하지만 가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에세이를 만나기도 한다.
정말 이럴까, 정말 이렇게 고매할까. 정말 이렇게 순수할까? 궁금해진다.
적당히 미화된 삶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괜찮게 포장된 성격을 내놓은 건 아닌지,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닌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에 반해 조정은 작가의 [그것을 타라]는 읽는 이가 무안할 정도로 솔직하다.
남편사업의 부도로 인해 백화점 청소부로 취직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낸다.
백화점에서 함께 청소하는 할머니들이 속옷에 몰래 싸지고 나온 반찬과
제과점에서 버리는 빵을 즐겁게 집으로 가져간 이야기도 담담하게 건낸다.
다른 직장을 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청소부를 택한 그녀가 이상했다.
처음엔 문 내린 백화점 청소는 아무도 보는 이 없어서 창피하지 않기 때문에 택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백화점 청소부로 취직된 것을 친구에게 전화로 자랑하는 장면에서 내 빗나간 추측을 확인했다.
그러면 무엇일까?
비오듯 땀을 쏟으며 상행선 에스컬레이터를 반짝반짝 광이 나도록 닦으며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 비상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일을 끝내고 백화점을 나왔을 때 새벽 여명이 강하게 밝아오는 것처럼 그녀의 미래도 그렇게 밝아 오리라 꿈꾸었는지 모른다.
청소부에서 강남의 보석회사 매니저로 일하면서 엄청난 매출액을 달성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성실함과 프로 기질을 보았다.
역시나 그녀는 작은 보석상을 위탁받아 경영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움막 같은 집에서 산다.
그래도 그 움막 속에는 가장 안락하고 풍요로운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고,
그 움막에서 에너지를 충전하여 화려한 거리로 나왔다고 저자는 회상한다.
움막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고, 지켜야 할 가정이 있기에,
곤한 육신 누일 수 있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살 비빌 수 있는 곳이기에 그녀는 그곳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캐나다에 가족을 보내고 가정을 잃은 한 남자를 집으로 초대하는 용기를 발휘한다.
그 남자에게 집이 아닌 가정을, 가족을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나를 눈물짓게 만들었던 그 가족들을 말이다.
손주를 낳자 칠칠일이 되도록 손자를 위해 이레마다 백설기를 찐시어머니,
부부싸움하고 찾아온 딸에게 꾸깃꾸깃 모아놓은 3만원을 주시던 아버지,
자식들 먹이려고 그 무거운 콩 한 가마를 이고 바람타고 산을 넘으신 어머니,
"어이 축하해" 하며 부도 소식을 너무나 쿨하게 알려준 남편,
그리고 대학에 안 가고 패스트 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는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까지.
가족들이 갈등하고 부딪히며 상처를 주고 분노하고 미안해하고 화해하는 모습은 가슴 찡한 감동이다.
이 책은 에세이라기 보다는 자전적 소설에 가깝다.
다른 수필에 비해 한 편 한 편의 분량이 길고 묘사가 뛰어나며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점이 그렇다.
수필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도 한 번 잡으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정도로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잡은 이 책을 대여섯번 자세를 바꾸어가며 한 자리에서 다 읽었다.
앉은자리에서 책을 다 읽는 일은 내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만큼 흡입력이 강하고 재미있다는 말이다.
지금 시각은 새벽.
곤히 잠든 가족들의 얼굴을 지긋한 눈빛으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수필을 만난 행복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