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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 몰랐던 조선 - 신봉승의 조선사 행간읽기
신봉승 지음 / 청아출판사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사람이나, 일, 취미 같은 것에 웬만해선 잘 빠지지 않는 편이나 한 번 빠지면 무섭게 빠져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역사'는 사랑과 일, 신앙 다음으로 내가 빠져든 세계이다.
6년 전 책을 통해 소개받은 역사서 한 권에 매료되어 오늘에 이르지만, 다른 것에 비해 속도가 더딘편이다.
역사서는 다른 소설이나 자기계발서 책처럼 한 번의 감동이나 교훈으로 끝나는 분야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를 요하는 지식과 시대와 사람과 사건을 그물망처럼 연결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더 나아가 그 시대와 서구의 문화를, 그 시대의 사람과 서구의 인물을 비교하며 함께 볼 줄 아는 넓은 식견을 요구하기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읽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력과 광범위한 범위도 기를 죽이는 데 한 몫한다.
또 같은 사건을 다르게 다루는 엇갈린 기록들도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 중 하나다.
역사서는 분명 만만치 않은 상대이나 묘한 매력과 신비로움으로 나를 한없이 끌어들이고 나는 이를 기쁘게 여기고 빠져들기를 자처한다.
다른 어떤 것에도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나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역사서,
오늘은 [조선도 몰랐던 조선] 에 흠뻑 취했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조선도 몰랐던 조선]은 [조선왕조 5백년]의 극작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신봉승 교수의 역사에세이다.
역사를 주제로 한 50여 편의 에세이는 500년 역사의 행간에 숨어 있는 조선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조선에 대해 잘못 알려진 이야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27명의 왕과 신하와 선비를 중심으로 엮어놓았다.
대부분의 내용은 이미 읽은 내용이어서 복습하고 되새기는 마음으로 편하게 읽었고,
중간중간 새로운 사실을 접하는 부분에서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빠져들었다.
연산군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김처선과 같은 내시들이 <경서>와 <사서>에 통달한 사람들이었다는 것과
성불구자인 내시들이 처, 첩을 거느리며 호화롭게 살았다는 사실은 새로운 발견이다.
고려조에는 내시들에게 겸직이 인정되었다는 것, 조선조에서는 내시가 대감이라 불리는 2품직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나 직언하다 폭군 연산군에게 무자비하게 난자당하고 잘려나간 김처선의 죽음은 여전히 안쓰럽고 안타깝다.
이 안타까움을 상쇄해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자건과 조광조.
조선에선 임금이 하루에 네 번씩 젊은 경영관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한다.
이 자리에서 이자건과 중종은 중종에게 직언한다.
임금을 백성들이 선출하는 것도 아니고, 임기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 왕에게 말이다.
만약 정암 조광조가 살아난다면 오늘의 정치인들과 최고 권력자에게 무어라 직언할까.
정치인들은 정암이 살아서 뚜벅뚜벅 걸어나오기 전에, 그의 준열하고 곧은 가르침과 행보를 배워야 할 것이다.
시간을 쪼개어 국가운영의 방향을 자문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존경을 표해야 마땅하다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읽으면서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내용은 <목민심서>가 쓰인 배경이다.
자신의 생식기를 스스로 잘라야 했던 농부의 척박하고 궁핍한 삶과 아전들의 행패와 만연한 부패는 책을 덮은 뒤에도
농부 아내의 울부짖는 소리와 정약용의 분노가 한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가장 낮고 가난한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같은 지방관들의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무원들이,
공무원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정직하고 선한 사람들이,
사회 요소요소에서 처처에서 많이 나오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지금 21세기의 역사를 함께 쓰고 있다.
이왕이면 덜 부끄럽고 더 아름다운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