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감는 여자
박경화 지음 / 책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태엽은 수동식 시계의 생명과 같은 것이다.

태엽을 감아 주어야만 시계가 움직이고 태엽이 풀리면 시계 바늘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멈춘다.

때문에 시계를 죽이지 않으려면 태엽이 완전히 풀리기 전에 미리 감아주어야 한다.

 

 

[태엽감는 여자]는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8편의 소설 중 '현실은 비스킷'이란 소설을 제외하고 나머지 7편은 모두 여자 중심형 소설이다.

7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어둡고 슬픈 여인들이다.

 

젊은 약혼자가 있음에도 중년의 유부남을 거절하지 못하고 친구라는 명목으로 계속 만나는 젊은 여성,

알콜 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남편으로부터 일상을 구속받는 아내,

뺑소니 사고로 하체 불구가 된 남편을 대신해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신혼의 주부,

완벽한 조건을 뿌리치고 자유를 찾아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간 엄마 등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소설 속 여인들은 하나같이 슬픈 운명을 타고난 듯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슬픈 인생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다.

모든 선택에는 반드시 치뤄야 할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염두해 두지 않았거나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결과가 자신들의 미래를 발목 잡을 수도 있는데 그녀들은 신중하지 못하고 다분히 즉흥적이다.

물론 그녀들이 처한 환경은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지만, 그런 환경이라고 다 같은 선택은 하지 않는다.

 

결혼 상대자가 있으면서 유부남인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만남을 가진 것은 그녀가 선택한 것이다.

중년 남성을 '친구'목록에 올리는 것은 궁색한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졸지에 불구자가 된 남편을 두고 낯선 남자와 격렬한 하룻밤을 새우는 여인도 결국 그녀의 선택에 의해 벌어진 일이며,

노력하고 희생하는 삶에는 소질이 없다고 말하는 주부, 완벽한 결혼 생활에 염증과 한계를 느끼고 

감행한 일탈의 너무도 끔찍한 대가는 잘못된 선택에 기인하는 것이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겁다.

소설 속 다양한 여성들의 삶 만큼 그 슬픔도 가지각색이다.

작가는 왜 하필이면 위태롭고 그늘지고 우울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줄지어 세웠을까를 생각하다가

작가가 설정한 인물들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여성들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어디에도 드러내기 힘든 여성 특유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실수와 후회를 잘 버무린 작품이다.

거기엔 시대가 주는 아픔도 있고, 개인의 쓰라린 상처도 있다.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이들이 겪을 법한 보통 사람들의 아픔이다.

이들이 겪는 우울함이나 슬픔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친구들이 당할 법한 아픔이요,

우리의 언니들의 가슴앓이요,

동생이나 이웃의 우울함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무겁고 답답했는지도 모른다.

 

긴장 따위가 풀려 몸과 마음이 느슨해질 때 흔히 '태엽이 풀리다'란 표현을 한다.

긴장이 풀려 느슨해지는 것보다 적당한 긴장이 오히려 좋다고 생각한다.

태엽이 완전히 풀리기 전에 태엽을 감으며 자신의 삶을 체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태엽이 풀림과 동시에 느슨해지고 흐려지는 선택으로 인해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지지 않게,

그 선택의 쓴맛을 혹독하게 치루기 전에 태엽을 미리 감으며

'수리하는 인생'이 아닌 '정비하는 인생'으로 밝고 경쾌하게 살기를 바란다,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다음에 만나는 박경화 작가의 책에서는 상처를 딛고 일어난 밝은 여성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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