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 소녀 마사. 마사는 자기의 이름을 싫어한다. 친구들이 바보같은 이름이라고 놀리기 때문이다. 마사에게는 이름보다 더 많이, 자주 불리는 '누더기 앤'이라는 별명이 있다.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준 칙칙하고 괴상한 옷을 입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이다. 마사도 새 옷을 입고 싶어하나 엄마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마사의 부모님은 '의로운 사람들'이라는 사이비 종교의 신도로서 마사에게 엄격한 생활을 강요한다. '의로운 사람들'의 엄격한 규율은 안락하고 즐거운 생활을 '죄' 로 여기며 숨막히는 생활을 한다.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없는 집에는 뉴스만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있을 뿐이다. 집으로 친구를 데려와도 안 된다. 그랬다간 지하에 사는 '혐오'의 정체가 발각 될 수도 있으니까. 마사는 애들이 뒤쫒아오며 놀리는 것보다 '혐오'의 밥을 챙겨주는 일을 더 끔찍해한다. 도대체 혐오의 정체는 무엇일까? 후반부에 혐오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독자들을 충격으로 몰고가며 소설은 가속도가 붙는다.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 오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괴상한 옷을 입고, 바보 같은 이름을 가진 마사는 마음 터놓을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는 왕따다.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고 집에서도 그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마사는 친구들의 놀림은 피하고 부모님에겐 순종하는 착한 아이다. 언니처럼 열여덟 살이 되면 집에서 탈줄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마사에게 스콧이라는 전학생이 마음을 열고 다가온다. 스콧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속 깊은 친구다.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스콧의 우정에 힘입어 마사는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과 당당히 맞선다. 내 편이 되어 줄 친구, 나를 지지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이처럼 든든한 것이다. 스콧은 마사와 같이 왕따가 되지만, 오히려 마사를 더 이해하고 가까워지게 된다. 왕따를 도와주는 것은 왕따를 자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이 왕따를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마사를 도와주고 마사의 편이 되어 준 스콧은 약자를 보호 할 줄 알며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진정한 친구다. 영국이나 우리나라나 청소년 문제는 비슷한가 보다. 성장소설 [사라지는 아이들]로 유명한 로버트 스윈델스의 [누더기 앤]은 성장소설이다. 청소년기의 두 아이가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부모의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얼마 전에 읽은 성장소설 [주문 외우는 파랑새]의 주인공 예린이와 마사가 오버랩되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어야 한다. 마사의 부모님도 마사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다. 다만 사랑을 주는 방식이 잘못된 것일 게다. 주고 또 주어도 모자란 것이 부모의 사랑일진대, 이왕이면 받는 사람이 원하는 식으로 주는 건 어떨까? 토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밤낮 고기만 주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