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기 전 약간의 정보가 있었다. 정말 불운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그래서였을까? 2권을 읽다가 무심코 남은 페이지를 봤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렇게나 많이 남았다고? 지금 그래도 다들 나름 행복해하고 있는데 아직도 할 이야기가 이렇게나 많다고? 그냥 불운한 게 아니라 ‘정말’ 불운한 사람이라는 단어 조합은 어쩐지 이대로 끝나진 않겠구나 싶은 예감을 강하게 심어놓은 모양이다. 책의 내용에 빠져들어서 ‘여기까지만 읽고 말까?’라는 고민을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 싶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24년 10월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어딘가로 들어가는 초입이라 차들이 속도를 내는 곳도 아니고, 시야에 사각이 생기는 곳도 아니다. 차들이 지나가면 사람은 알아서 길을 건너고, 사람이 길을 건너는 중이면 차들이 멈추는 그런 곳. SUV 차량이 건널목을 지나치다 멈춰 서기 직전이다. 그 차가 완전히 멈추면 길을 건너야지 생각했는데 반박자 빠르게 오른발이 앞으로 나갔다. ‘어라’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내 예상보다 몸이 살짝 오른쪽으로 치우쳤다. 그 상태로 한두 발짝 떼었을까? 그사이 완전히 멈췄던 차가 다시 앞으로 가기 위해 움직였는데 운전 미숙인지 차가 뒤로 밀렸다(평지에서). 다른 때 같았으면 이런 상황은 아무런 문제도, 아무런 생각거리도 되지 않았겠지만, 이때는, 내 의도와 다르게 몸이 조금씩 다르게 반응한 그 순간엔 그렇지 않았다. 간신히 접촉을 피하긴 했다. 만약 내 오른발이 조금만 더 오른쪽에 놓여 있었다면 피하지 못하고 내 무릎은 꺾였을지도 모른다. 큰 부상일 수도 있겠고, 조그만 부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내 삶의 방향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거다. 아주 찰나의 한순간 때문에.
그 짧은 순간. 모두가 나름 행복하게 미래를 바라보던 순간, 이야기는 방향을 틀었다. 삶은 의도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견디고 견디면 좋은 때가 오기도 하겠지만 그 기간이 영원할 리 없다. 책을 다 읽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과거를 극복하는 건, 특히나 어린 시절 겪은 어떤 경험을 뛰어넘는 건 더욱 어렵다는 걸 안다.
그는 이미 왜 그런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 일들은 다 그가 겪어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리틀라이프 1권)
게다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 정도면 과거의 경험은 몸과 마음에 새겨진 각인이다. 잊을 수도 없겠지만 희미해졌던 각인은 중요한 순간 벌겋게 달아오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럴 때마다 웅크리고 걸음을 떼어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등장인물인 주드에겐 앞으로 나아갈 아주 커다란 기회가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믿게 된 사람들이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그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걸 이해하게 됐고,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런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그래도 인생은 쉼 없이 앞으로 나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실망시킨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적어도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이 하나는 있었기 때문이다. (리틀라이프 1권)
“내 생각엔, 모든 상황을 고려하건 안 하건, 넌 굉장한 사람이 됐어.” (리틀라이프 2권)
내가 무조건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도 나를 믿고 인정하니까. 나에게 새겨진 각인을 보고서도 내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일 누군가가 있으니까. 그건 웅크리기만 하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줄 삶의 동반자가 있다는 얘기니까. 그렇다는 건 이 세상에서, 적어도 한 사람에겐 내 삶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의미니까.
“내가 아닌 척하고 있는 대가를 네가 치르고 있는 걸 알아. 그래서 그만두려고.” 그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뜬다. “난 불구야.” 그는 말한다. “난 장애인이야.” 정말 바보 같지만, 울음이 터질 것 같다. 그는 결국 마흔일곱이고, 이걸 스스로 인정하는 데 32년이 걸렸다. (리틀라이프 2권)
그래서 주드가 행복했으면 싶었다. 능력 있고 좋은 사람들이 비현실적으로 많이 나오지만, 단 한 사람으로 인해, 딱 한 명이면 충분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 바람은 마음과 몸에 짐을 짊어지고 사는 모든 삶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희망이었을 거다. 어쩌면 삶을 향한 투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힘들었으면 됐잖아! 이젠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어떤 삶을 살았든 세상은 ‘마땅함’이란 단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니, ‘마땅함’을 끌어낼 능력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너무나 많은 삶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어서.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읽었다. 그래도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