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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해가 지는 곳으로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8월
평점 :
건지마저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나는 거울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벌 틈에 살아남은 꿀벌처럼 내가 말벌인 줄 알다가 결국 말벌이 될 것이다. 말벌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꽃과 꿀과 나비를 우습게 여기게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언제부터일까? 혐오의 시대를 살던 우리가 본격적인 분열의 시대로 접어든 때가. 밑바닥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던 혐오가 그늘과 어둠을 벗어나 자랑스럽게 빛 아래로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 때가. 정말 몰랐던 걸까? 이미 진즉에 유럽 정치권에서 극우가 득세하고, 미국에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아니겠지 싶었다. 아니, 애써 외면했던 거 같다.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했던 곳이 이 땅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깜빡했던 게 있었다. 역사를 통해 사람들은 반성하고 배우기보단 끊임없이 반복하고 후회만 한다는 사실을. 젠장, 언제부터였을까? 나와, 우리만 존재하고 너를 지운 세상이 전부가 되어버린 건.
괜찮아. 이것도 삶이야. (본문 중에서)
그래. 그래야지 어쩌겠나. 생각을 바꾸면 많은 게 가능해진다. 살아야지. 그런데 생각을 바꾸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는 건 꼭 긍정적인 부분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뭔가를 벗어던지면 사람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던 누군가처럼. 옳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 적절치 못한 수단을 휘둘렀다. 역사에 남을 하나의 생채기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 펼쳐질 우리 사회를 향한 하나의 선언일 수도 있지 싶다. 정치는 더 이상 타협과 협상이 우선이 아니다. 이젠 분열과 대립이다. 나와 다른 너를, 우리와 다른 너희들을 짓밟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강자의 사고방식이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짐승의 행동 방식이다. 안타깝게도 과거의 혐오가 그랬듯이 이들도 사회 밑바닥에 자리를 잡은 상태다. 기성세대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녀 구분 없이. 괜찮을까?
언니, 일단 살아야지. 살아야 만나지.
...... 저절로 만날 수는 없어.
도리가 말했다.
만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몰라.
지나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알면서도 가겠다는 거죠. 죽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도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 중 가장 작고도 단단한 도리의 음성. 그렇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제발 언니, 우리랑 가.
우리와 함께 간다고 목숨이 보장되는 건 아니야, 지나. 이들에겐 이들의 기적이 있어.
(본문 중에서)
세상이 바뀌면 동일한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 ‘우리’란 단어는 늘상 쓰는 말이면서도 참 아름답고 좋은 단어다. 마치 사람이 숨 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무섭고 끔찍한 의미로 돌변한 ‘우리’란 단어를 직면하는 일상이 올까? 정말이지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누구든, 뭐가 됐든 딱 한 번씩만 더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싶다. 우리의 삶도 중요하지만 딱 그만큼의 비중으로 그들의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겐 그들의 삶을 억누를 어떤 권리도, 정당한 수단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상대방에 대한 생각들이 밑에서부터 모여 빛 속으로, 위로 드러났으면 좋겠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지구에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퍼져 대륙의 서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질서가 사라진 세상은 힘이 지배한다. 그 와중에 조금의 인간성이라도 간직하려 하는 자들은 아주 힘겹게 버텨낼 수밖에 없다. 일종의 재난 소설의 형태를 띄지만, 작가는 정작 바이러스에 관한 관심은 크지 않다. 질서와 약속이 깨진 시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특히 상처 입은 약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회복시켜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둔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펼친 책인데, 읽은 시기 때문인지 의외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어쩌면 최진영이란 작가의 글이 나랑 잘 맞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글을 읽다 보면 많은 울림이 있다. 잔잔한 물 위에 퍼지는 파문처럼 그 울림은 내 생각에 끊임없는 진동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