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고 산에 올랐을 때,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산 정상에서 만난 고양이는 모지리 하나뿐이다. 다른 고양이들은 성장하면서 영역 개념이 뚜렷해지자 자리를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 다들 어린 고양이 중심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여전히 주변에 머무르고 정상에도 나타나지만 내가 못 보는 것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자연적인 현상일 테다. 하지만 새끼 고양이들과 어미 고양이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 한쪽으론 경사가 심한 지형이라 주요 등산로에서 접근하지 못 하게 굵은 밧줄을 가로질러 통행을 막아놓았다. 그런데 그 밧줄 일부가 잘려져 있던 날이 있었다. 그날, 모지리는 가장 먼 쪽 성벽 구멍에 앉아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쏙 피해서 다신 나타나지 않았다. 새끼랑 어미를 한꺼번에 구조했을까? 비가 오는 동안 새끼들의 건강 상태가 안 좋아졌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구조되었다면 살아서 좋은 곳에 정착했으면 좋겠다. 구조된 게 아니라면 자연의 품에서 그들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작년 9월 말 아니면 10월쯤에 산고양이들을 처음 봤으니까 거의 1년이 되어 간다. 더위가 시작되기 전까지 개체수가 두 배 이상 늘었지만 내가 정을 줬던 건 삼색이와 모지리다. 삼색이의 첫 등장이 너무 강렬했고, 모지리의 어수룩함이 너무 어이없었다. 둘 다 정상에서 쭉 지냈으면 좋았으련만. 그럼, 유난히 희멀건한 저 모지리가 외로워 보이지 않을 텐데. 그래도 어쩌겠나 싶다. 그들이 내린 선택이거나 그들이 맞이해야 할 운명일 테니. 9월이 지나면 난 이 산으로 지금처럼 발걸음을 자주 하지 않을 거다. 처음 마음먹었던 1년이 지나면, 이들을 만나기 전에 그랬듯이 이 산에도 갔다가 저 산에도 갔다가 그러겠지.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가 볼 생각이다. 항상 그렇듯 모지리는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닌가?’ 싶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살피겠지만, 그 어리숙한 매력을 정상에서 계속 건강하게 뿜어냈으면 좋겠다. 그래, 뭐든,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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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마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을 거다. 어른 걸음으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그 또래들 몇몇이 어울려 간 적이 있었다. 항상 엄마와 함께 가던 시장을 넘어서 한참 먼 거리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몰려갔다. 그리곤 덜컥 겁에 질렸다. 여기가 어디지? 놀이가 끝날 때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불안함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일행 중 두 살 많던 사촌 형은 집으로 가자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집들이 연이어 있다가도 느닷없이 커다란 공터가 나오고 빈집처럼 보이는 폐가도 보였다. 이윽고 등장한 낯익은 환경에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그 먼 길을 안내한 형이 대단해 보였다. 좁디좁은 내 삶의 공간, 그 너머 미지의 불안한 영역. 그게 처음으로 인지한 내가 살던 동네였다.


20대, 재수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면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내 기본 걸음은 무척이나 빠른 편이었다. 길에서 걸을 때면 내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제치면서 걸었다. 그래서 누군가 그랬다. 길에서 동계 스포츠 종목인 쇼트트랙하냐고. 길을 걷는 걸 좋아했다.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집까지 걸어오기도 했고, 청계천 세운상가에 들러 게임 CD를 사고 집으로 무작정 걷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 걸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종로에선 ‘얼굴에서 밝은 기운이 뻗어 나오네요.’라며 접근하는 일명 ‘도를 아십니까?’ 아, 네. 후다닥. 청계천에선 ‘좋은 거 있는데 한번 볼래요?’라며 밀착하는 불법 비디오, 잡지 판매상들. 아니요, 아니요. 허겁지겁. 도시는 자기 민낯을 그렇게 불쑥 들이밀곤 했다.


30대의 길은 내겐 모순이었다. 걷기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시간을 늦추기 위해서 길을 걸었다. 아니, 헤맸다. 10대 후반부터 매캐한 냄새를 풍기던 삶은, 20대에 불구덩이를 선사하더니 30대엔 모든 것을 그을렸다. 집에 가기 싫어서 어떻게든 걷는 시간을 늘렸다. 하지만 그곳에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있었기에, 그 존재를 혼자 둘 수 없었기에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시간을 늦추고 싶지만 빨리 걸어야만 했던 길은 그 모습 그대로 내 삶이었다. 다 포기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버릴 수 없었던 시간들. 이 시기의 도시는 내겐 공간이 아니었다.


40대에 이르러서야 난 소원을 이뤘다. 내 삶은 내 뜻대로 하겠다는. 거무튀튀한 그을음을 벗겨내기 시작했고, 의도적으로 걸음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지쳐버린 심신으로 시야는 여전히 좁았지만, 시간 속에서 포효하며 떠돌던 생각들을 공간으로 가라앉힐 수 있었다. 현재의 나를 차분히 바라보게 되면서 미래를 기대하고 과거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고양이가 들어왔다. 뒤틀리던 시공간을, 흔들리는 도시를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게 됐다.


20년 넘게 이 집에서 살았지만, 집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걸어서 갈만한 거리에 조선의 궁들이 있다는 것을, 뒷산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다는 것을, 저만치 앞산에는 한양도성이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일을 놓아버린 50대가 되어서야 알았다. 산길을 헤매고 골목길을 누볐다. 엉뚱한 곳으로 내려와 다시 산으로 들어가고, 지붕이 내 키보다 낮은 집들 사이를 허둥지둥 빠져나오기도 했다. 아파트마저도 그 느낌이 달랐다. 사람들이 일하러 빠져나가 인기척이 없는 세련된 유령도시 분위기의 아파트부터, 힘겨워 벤치에 앉아계신 노인분들 너머로 어린이집의 고함소리가 흘러넘치는 아파트까지. 내가 보고자 했더니 도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면모를 드러내는 중이다. 아마도 다 못 읽겠지만, 50년을 살고 나서야 차분하게 도시를 읽어보려 한다.


꼬리말) 이 글의 제목은 AI가 내게 제시했던 문장이다. 간혹 이렇게 글을 써볼까 한다. 떠오르는 문장 아무거나 하나 말해보라고 AI에게 부탁한 후, 그 문장에서 비롯된 내 생각을 표현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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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깼다. 정확히는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몸은 아직 내 통제 밖이다.


이런.


가위에 눌린 상태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리 없지만 욕을 해본다. 습관이다. 밤이 무섭고 자는 게 두려울 때, 가위에서 풀리면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너무 무서워서.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극복했지만, 간혹 가위에 눌린 상태로 정신이 돌아오면 반사적으로 욕을 하고 투덜댄다.


또냐? 적당히 좀 하자. 니미.


몸의 끝부분,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움직여서 가위를 풀어내라고 하지만 내 경우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서 푼다. 이것도 습관이다. 맨 처음 가위에 눌렸을 때 목을 돌리면서 풀어냈거든. 그 탓에 목에 힘을 주는지 풀리고 나면 목이 뻣뻣해서 고개를 살살 돌려줘야 한다. 이 정도면 양반이다. 매일 같이 가위와 벗 삼을 땐 풀린 뒤에도 그 우정에 짓눌려서 눈조차 뜨지 못했다.


뻣뻣한 목 근육을 풀고서 누운 채로 주변을 둘러본다. 있다. 내 허벅지 옆에 검은색 자취가 보인다. 팔다리 위아래로 쭉 펼친 자세로 세상 모르게 널브러져 자는 중이다. 입양한 지 3개월 정도 된 아기 고양이. 나도 다시 잠을 청한다. 가위눌린 흔적 같은 건 더 이상 없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다가 썬데이 저스티스라는 고양이를 만났다. 반가웠다. 그리고 카야를 이해했다. 난 요즘도 아무 이유 없이 잠에서 깨면 습관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고양이를 찾는다. 어딘가에서 나를 시야에 두고 있을 고양이를. 어둠보다 더 짙은 그 어두운 색채에 악몽도, 가위도 발을 내딛지 못한다.


‘카야는 옷 입은 채로 그 자리에 누웠고 둘 다 아늑하게 자리를 잡았다. 카야는 고양이가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다 따라서 잠이 들었다. 더는 화들짝 소스라쳐 깨어나지 않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평온 속에 표류했다.‘

-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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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잃은 것


1. 심장

 - 공감 능력을 잃었다.

 - 다른 존재의 고통에 무감하다. / 분업의 영향일까? 사냥하지 않고 죽음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 우린 죽음과 너무 동떨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 아이언맨의 심장이 필요하다. / 그렇다고 해결될 거 같진 않다. 핵심은 심장이 아니라 우리 그 자체니까. 심장만 얻으면 블립으로 나머지 반까지 날려버릴 수도. 


2. 청각

 -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 타협을 죄악시한다.

 - 데어데블의 귀가 필요하다. / 그렇다고 해결될 거 같진 않다. 더 미쳐버릴 수도.


3. 균형 감각

 - 내가 있는 자리가 옳다.

 - 단순하다. / 이거 아니면 저거. 이거를 선택했다면 저거는 악이다. 이거, 저거 말고 그거, 요거 등이 있다는 사실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 복잡한 사회상의 부작용인 모양이다.

 - 스파이더맨의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 그렇다고 해결될 거 같진 않다. 익명성 뒤에 숨지만, 은근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해서.


4. 여유

 - 무엇인가를 당장 원한다. / 조삼모사. 아침에 무조건 네 개.

 -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이 필요하다. / 그렇다고 해결될 거 같진 않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다. 욕심이 문제지.



* 우리가 얻은 것


1. 편리함

 - 말해 무엇하겠나.


2. 뻔뻔함

 - 말해봤자 안 믿을 거다.

 - 최근엔 자본주의의 뻔뻔함을 스승으로 삼은 듯.


3. 확신

 - 유구무언


더 있을 거 같긴 한데 고양이가 맡겨놓은 거 찾으러 와서 여기까지만.


이 자슥, 너 나한테 간식 맡겨놨냐? 너무 당당하잖아!

야옹! 야~옹!

기다려라! 누굴 닮아서 그렇게... 


그런데... 고양이는 DC 캐릭터 아닌감? 블랙팬서가 고양이과던가? 헤, 아서라, 벌레도 제대로 못 잡는 녀석이 무슨.

야아~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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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일주일 ㅣ 트리플 8
최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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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매일 확인했다. 돈을 내는 자의 무례와 경멸을. 수치심까지 짓뭉개는 뻔뻔함을.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고서도 불공평이나 역차별이란 단어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을. 나는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했고 더 알아야 할 것들이 두려웠다."

- <일주일> 중 <일요일>에서


2010년쯤 됐을까? 남자 고등학생을 주말 오후 알바로 채용한 적이 있다. 용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어른과는 대화보단 대답을 했고, 무덤덤한 듯 조금은 뚱한, 흔히 볼 수 있는 청소년이었다. 한 달이나 일했을까. 손님과 마찰이 생겼다. 기억은 안 나지만 사소한 문제였다. 손님이 본사로 클레임을 제기했고, 내게로 넘어와서 CCTV를 확인해 보니 근무자의 불찰이 분명했다. 아마 그 자리에서 근무자가 사과했다면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근무자는 사과 대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선택을 했다.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잘못을 인정했고, 고객이 찾아오면 함께 사과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다시 연락해 온 고객은 진정한 사과를 바란다고 했다. 근무자가 무슨 생각을 하며 일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어서 골머리를 앓던 나는 이 고객의 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정한' 사과라니. 배를 할복하는 일본 사무라이의 이미지가 떠올라 순간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에게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얘긴가. 이 문제로 몇 주를 끌었던 거 같다. 결국 나는 그 고객과 언성을 높여야만 했고, 결과적으로 서로 보지 않는 걸로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오래전 일이라 완벽한 기억은 아니다. 아마 저 근무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뒀지 싶다. 내가 사람을 새로 구할 때까지만, 또는 앞으로 2주 후까지만 일해달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해당 고객이 매장 근처에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저 일을 겪으면서 많이 답답했다. 나와 다른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를 내 경험으론 유추할 수가 없어서. 청소년에게 필요 이상의 책임을 요구하는 어른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최진영 작가의 <일주일>은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다. 너무 전형적인 틀에 가두는 게 아닐까 하는 작가의 걱정처럼 각 캐릭터는 무미건조한 듯하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무미건조하면서도 개별성이 있는 존재 아니던가? 문제라면,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의 개성이나 개별성을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는 게 아니라 경쟁의 차별화 수단으로만 파악한다는 점. 그래서 어느 위치에 서든 아이들은 차별화를 위해 발버둥을 쳐야만 한다.


"돈과 명예 말고, 우리가, 또 다른 가치를 가져야만 해? 사랑, 희생, 정의, 존엄 같은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해버리면 삶이 복잡하게 꼬일 것만 같았다. 그런 가치를 추구하느니 조롱하는 편이 쉬웠다."

- <일주일> 중 <수요일>에서


어쩌다가 우리는 그 발버둥의 결과만 가지고 사람을 판별하게 됐을까? 왜 우리는 수직으로 늘어선 위치에서 벗어나려 하는 시도를 불손하다고 여기는 걸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아이들이 원하는걸, 찾으려는 걸 막아가면서 이 숨 막히는 사회의 축소판에 그들을 욱여넣고 있는 걸까? 온통 질문뿐이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게 편하니까. 답도, 원인도 내심 짐작되지만 해결할 순 없으니까. 흐지부지.


난 그때 그 아이에게 더 물어봐야 했을까? 참견이나 간섭이라 여겼을 것이다. 고맘때의 나도 그랬었다. 필요한 건 배려와 공감과 기다림과... 이런, 숨 막힌다. 어쩌겠나. 어른들이 이렇게 만들어놓은 세상이니 모두가 함께 숨 막힐밖에. 같이 숨이라도 막혀줄 수밖에.


"당신이 거기 잘 있으면 좋겠어."

- <일주일> 중 <사사롭고 지극한 안부를 전해요>에서


갑갑한 <일요일>에서 시작해 충격적인 <수요일>을 거쳐 희망적인 <금요일>을 지나면 작가의 에세이가 나온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는 안부를 전하고, 그 안부에 깃든 걱정과 잔잔한 고집을 뒤로하면, 진짜 청소년의 에세이가 버티고 있다. 움켜쥔 그 희망에 맘을 담뿍 담아 응원을 보낸다.


"짧은 생에 다 품기엔 무겁다 싶을 때마다 넓게 보고 많이 사랑할 것이다. 쫓기는 삶이 안정될 때까지 가끔은 도망치면서 살길. 이 결심에 죄책감은 느끼지 않기로 했다."

- <일주일> 중 <지금 도망칠 준비가 되면>,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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