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공사 현장이 보인다. 20층이 넘는 건물 두 채는 이미 완공이 됐고, 주변을 둘러싼 길을 만드는 중이다. 벌써 두 달 가까운 기간인데 아직도 완성은 멀어 보인다. 원래 길이 없던 곳에 길을 내고, 길은 있었으나 오래된 시멘트 보도를 걷어내고 길을 만든다. 그 탓인지 작업은 더디고 신중하다. 포크레인 한 대와 작업자 세 명. 이들이 기본이고 간혹 주변 통제를 위해서 몇 명이 더 들러붙기도 한다. 땅을 파고, 배관을 묻고, 도로와 보도의 경계를 구분한 후 경계석을 세우고, 시멘트를 붓고, 경계석을 다시 세밀하게 정렬하고. 포크레인이 이렇게 다양한 작업을 하는지 미처 몰랐었고, 새로운 길을 까는 게 이렇게 지리한 작업인지 역시 몰랐었다.


길의 운명을 생각해 본다. 물리적으로 밟고 지나가는 존재야 사람이겠지만 그 위로 흘러가는 게 어디 사람뿐일까. 빗물과 바람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가며 주변 환경이 스며들겠지. 그에 따라 길은 고유의 색채를 드러낼 거고, 감정을 품을 거다. 그 색채와 감정이 누군가를 불러들이고, 누군가에겐 영향을 미칠 거다. 언젠가 한 번쯤은 표면이 뜯기고 새로 치장하겠지만 환경이 변하지 않는 한 길은 기존의 색채를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무엇이든 존재의 흐름을 쫓다 보면, 사람과 다름이 없는 건가? 아, 내가 생각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내가 사람이라서, 사람인 내가 내 존재를 무생물에 투영해서. 길은 그냥 있을 뿐인데.


음, 그래 분명 다르다. 길은 탄생의 산고를 치르는 중인데,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은 먼지가 나서, 시끄러워서, 돌아가야 해서 불평한다. 사람이 태어난다면, 누구도 그따위 불만을 내비치진 않는다. 돌이켜보니 나도 투덜거렸다. 역시 생각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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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층 수리로 발생하는 소음이 간간이 들린다. 이제 큰 소음은 없고,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자잘한 소리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 정도도 불안한 모양이다. 소음을 쫓아 집 내부를 천천히 살피던 녀석이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침대 머리맡 아래쪽에 둔 하늘색 여름용 방석 위에 자리 잡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여기서 잘 거니까 옆으로 오라는 의미. 위층이 수리하면서 생긴 생활 방식인데 내가 근처에 자리 잡지 않고 나오면 녀석도 따라 나온다. 그래서 책과 핸드폰을 들고 녀석의 곁으로 간다.


바닥에 앉아 침대에 기댄 채 책을 펼친다. <도시의 승리>. 2011년에 나온 책이니까 무려 15년 전이다. 알라딘에 읽고 싶었던 책으로 저장해뒀다가 이제야 읽는 중이다. 알라딘에 저장해둔 책을 생각하면 언제나 한숨이 앞선다. 죽기 전에 다 못 읽을 거야. 먹고 사는 게 뭐라고. 십몇 년을 죽지 않기 위해 먹고, 죽지 않기 위해 운동하고, 죽지 않기 위해 잤던 거 같다. '살려고'가 아닌 '죽지 않기 위해'. 옆을 보니 고양이는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땐 왜 이런 평화로움을 느껴보지 못했을까? 하늘색 방석 위에 짙은 회색빛 고양이. 그리고 책을 보며 내용보단 잡념에 빠져든 아저씨.


아, 그런데 이러고 앉아서 책을 보면 허리가 아프다. 엉덩이도 배기고. 평화가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는구나. 평화가 먹고 살 걱정을 없애주지도 못하겠지? 책을 덮고 벌렁 드러누워 핸드폰에 있는 전자책을 연다. <호라이즌>. 2019년 출간된 책이다. 도대체 시간을 따라잡질 못하누. 한숨을 쉬다 기척이 느껴져 옆을 보다가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발라당. 다짜고짜 애교를 투척한다. 잠정신일 텐데. 너 진짜 직업의식 투철하구나. 볼때기 몇 번 쓰다듬어주니 또 잔다. 이 녀석, 나를 알아보고 애교를 부린 걸까? 의심의 눈길을 던지다 다시 핸드폰에 집중한다. 이러고 핸드폰 보고 있으면 정말 게을러 보이던데. 읽으려는 책은 뒷전이고 온갖 생각의 단편만 둥둥 떠다닌다. 조각을 이어 붙여야 하는데, 어째 돌멩이가 날아들어 자꾸 파문이 인다. 고양이 너냐? 돌멩이 던지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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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끼 고양이의 호기심은 장소, 시간, 대상 불문이다. 3차원 공간을 익숙하게 쓰는 고양이의 능력은 집사가 바닥에 붙어있게끔 가만히 두지 않는다. ***


냥, 전망 좋네. 저 아저씨는 어두워지기만 하면 자. 뭐, 나야 좋고. 음, 저쪽이 여기보다 더 높아 보이는데. 저기로 가볼까? 웃차. 착지 성공. 랄라~ 가만, 위에 가방이 막고 있잖아. 비스듬하게 뛰어야 하나? 이 위에 올라가서 뛰어도 안 될 거 같은데…. OK. 행동은 생각보다 빠르다! 아깽이는 생각 따위 하지 않지. 하나둘, 점프! (팍팍팍. 앞 뒷발 발톱으로 장롱면 긁는 소리) (퍽. 낙하 후 바닥에 퍼질러진 소리) 아이 씨! 오구! 깜짝이야! 우와, 아저씨, 어떻게 그렇게 발딱 일어날 수 있냐? 한 번만 더 해봐.. 옷, 도망이다! 잡히면 죽겠다!


너 왜 자꾸 거긴 올라가려고 하는데?! 생각이 있어? 너무 높잖아!


아깽이가 생각이 있겠냐? 생각 좀 하고 살자, 아저씨. 그리고 고양이가 높은데 올라가는 건 당연한 거라고. 우린 항상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 우리가 얼마나 도도한 종족인데, 아직 그걸 모르는 거야? 아참, 이 아저씨, 고양이에 대해 너무 모르네. 알았어, 알았어. 오늘은 그만할게. 일어난 김에 까까 좀 주면 안 될까? 그냥 자네. 삐졌구나, 삐졌어. 아이고, 생각만 없는 줄 알았더니 소갈머리도 아주 쥐 대가리만 하네. 그래, 그래, 푹 자라, 푸욱 자.


랄라~ 고양이 눈은 어두워도 잘 보이죠~ 아깽이 눈은 신(神)도 두려워하죠~ 응, 저건 뭐냐? (푹푹푹. 문갑 밑을 앞발로 파헤치는 소리) (푹푹푹) 응? 뒤통수가 따가운데? 우악, 아저씨, 그렇게 발딱발딱 일어나지 마라! 간 떨어질 뻔했다! 고양이한테 간이 얼마나 중요한데.


너 또 뭐 하는데?!


아, 왜! 이번엔 겸손하게 아래쪽을 봤구먼, 뭐! 이거 봐라, 아저씨. 이 밑에 이런 거 진짜 많이 있다! 응? 어디 가? (후다닥) 나 응가도 안 쌌는데 그 축축한 건 왜 가져오냐? ... ... 뭐야? 그 축축한 걸로 다 긁어모으는 거야? 다 가지지 말고 나도 하나만 주라!


저리 안 가! 지금 너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잖아! 새벽에 가구 밑 먼지 청소하는 게 말이 되냐!


아 씨, 치사하게. 지 혼자 다 가지려고. 에잇, 치사하다, 너 다 가져라! 소갈머리가 쥐 꼬랑지보다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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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위에서 자다 고양이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2시. 주변에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데 어디서 운 거야? 컴컴할 땐 안 보이는 게 이 녀석 장기긴 하다. 식탁 불을 켜고 돌아보자, 녀석이 보인다. 소파 머리맡 아래쪽에서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중이다. 저기서 울었으니 내 귀에 울음소리가 꽂혔지. 눈빛에 담긴 기대에 부응하기로 하고 간식을 준비. 닭가슴살 트릿이다. 크기가 좀 큰 편이라 잘게 부셔준다. 그냥 주면 침만 묻히고 안 먹는 불상사가 생기곤 한다. 자기 침이라도 일단 입에 들어갔다 나온 건 먹지 않는다. 생각하지 말자. 열 받는다.


즐거운 간식 타임에 이은 응가 타임. 이어지는 우다다. 응가 싸서 기분이 좋은 건지, 어린 시절 응가 싸고 내게 쫓기던 트라우마가 있는 건지. 이젠 그러려니 한다.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퉁’ 하는 소리. 이상하다 싶어 마루로 나갔더니 고양이가 방충망 너머 베란다를 주시 중이다. 방충망을 앞발로 짚었다가 발톱이 걸렸는데, 억지로 빼내며 난 소리 같았다. 심상찮다. 베란다 불을 켜고 조심스럽게 나가서 살피는데 단번에 시야에 잡히는 검은 존재 하나. 밝은 베이지색 타일 위에 검은 바퀴벌레. 와, 존재감 어쩔 거야! 고양이, 크기는 네 앞발만 한데 존재감은 너를 압도한다. 내 말에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후다닥 뛰어 들어오지만, 갑자기 급선회하더니 조그만 날벌레를 향해 돌진. 바퀴벌레를 쫓아갈까 봐 순간 움찔했던 놀라움도 잠깐, 급격하게 퍼져 나가는 실망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아, 진짜 너는 길에서 너를 발견해 준 그 이모한테 평생 고마워해야 한다. 베란다 밖으로 연행되며 징징대는 고양이 소리를 들으며 농담 반 한숨 반으로 투덜거린다. 생각하지 말자. 열 받는다.


바퀴벌레 사냥 끝. 고양이는 베란다로 통하는 마루 창과 안방 창을 오가며 방정맞은 구경꾼 역할에 끝까지 충실했다. 불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이미 저만치 달아났다.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생각난다. 고양이기에 망정이지 사람이었으면 진짜 얄미움이 하늘을 찌를 뻔했다. 적어도 내가 하나는 확실히 틀렸다. 이 순간만큼은 녀석의 존재감이 세계 최강이다. 아우, 열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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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고 야구부에 6개월 출장 정지가 결정됐다. 처음 응원 구호를 들었을 때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놀라움과 어이없음이, 징계 소식을 듣고 착잡함과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특정 지역 학교를 대상으로 특정 단어를 썼단 얘기는, 그 기원까진 모른다 하더라도 현재 어떤 맥락으로 쓰인다는 건 알았다는 의미일 텐데.


자러 가기 직전, 스마트폰을 들고 가다가 아무 생각 없이 네이버의 뉴스 섹터를 봤다. 기사 제목은 모르겠다. 클릭해 들어간 그 내용엔 정치인들이 SNS를 통해 배재고 야구부 징계에 대한 의사표시를 하고 있음을 알렸다.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정치 참 편하게 하는구나. 갈라치기와 적대의 최전선에 있는 자들이 이젠 자신들이 누리던 무책임까지 선물인 양 다음 세대에게 물리려 하나. 정말 가혹한 건 말이다, 6개월이든 1개월이든 내려질 징계 자체가 아니라 이 아이들에게 찍혀버린 낙인이다. 스무 살도 안 된 청소년들에게 다가올 미래를 앞에 펼쳐질 길이 아닌 조여오는 숨통으로 만들어버린 게 정말 가혹한 거다. 그리고 이건 여전히 권력투쟁에 몰두하고 ‘나 아님 안돼’를 외치는 당신들이 일구어낸 현실이다. 그러니 가증스럽게 문장 몇 개 던져놓은 후 걱정하는 척하지 말고, 여야 불문 국민 앞에 고개라도 숙여야 할 일이다. 가해자로서 책임을 지고 나올 이 아이들의 숨통을 더 이상 조이지 말아 달라고. 피해자이기도 한 이 아이들이 힘겹게라도 나아갈 길을 조금이라도 열어 달라고. 안 그러겠지. 자기 자식이 아니니까. 더 거창한 일이 많을 테니까. 내가 어른이란 사실이 정말 부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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