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관련한, 특히 ‘길고양이’에 관해 해묵은 논쟁이 있다. 이들의 개체수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갈라파고스나 호주처럼 특수한 생태 환경을 지닌 곳에선 인간의 필요에 따라 키우다 야생화된 모든 생물이 생태계 교란종이다. 개, 고양이, 염소, 양, 말 등. 그럼, 도시에선 어떨까? 어차피 인간 중심 환경이라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할 순 없겠지만 야생화된 고양이는 분명 소형 포유류나 조류에게 위협이 된다. 그나마 이 위협을 줄일 방법은 길고양이들에게 충분한 먹이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양이들이 사냥을 멈추진 않는다. 그들의 사냥 본능은 꼭 먹기 위해서만 발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또 호불호 여부를 떠나 고양이의 배설물과 발정기 소리는 저층에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고양이로 인한 주민 사이 갈등은 어디서나 일어나고, 안타깝게도 그 모든 곳에서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우리 같은 경우 지자체에서 TNR(포획, 중성화, 방사)을 어느 정도 지원해 주는 탓에 가끔 유일한 해결책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이 또한 논쟁이 많은 정책이다. 외국에선 주로 동물보호단체들은 TNR을 옹호하고, 정부 기관이나 (넓은 의미의) 야생 동물 협회는 그 실효성을 의심한다. 그래서 간혹 극단적인 살처분(포획 후 안락사)을 주장하기도 하나, 이 역시 비용이나 실효성, 거기에 더해 윤리적 문제까지 겹쳐서 행정적 지원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결국 언제나 논쟁은 시작점으로 되돌아온다.


국회 홈페이지에 청원을 올리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최근 두 개의 의견이 대립 중이다. 하나는, 길고양이가 다른 동물들과 사람들에게 끼치는 피해를 고려해 급식소를 엄격히 통제하고 포획된 고양이를 보호할 시설을 확충해서 장기적으로 길고양이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 이에 반하는 다른 하나는, 저 주장은 결국 살처분하자는 것과 다름없으니, 지역적으로 꼼꼼하게 TNR을 시행하고 먹을 것을 충분히 공급하면서 안정적으로 개체수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 이 대립이 언제나 그렇듯 감정적으로 흘러갈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건 한쪽은 캣맘이나 캣대디를 조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다른 한쪽은 고양이에 몰빵함으로써 자신들의 성역을 구축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어찌 보면 지극히 인간적이다. 인위적인 적극 개입을 요구하는 쪽은 자기 삶에 조류가 핵심으로 들어온 상태고, 안정적 개체수 유지를 주장하는 쪽은 고양이가 중심을 차지한다. 이건 단순한 의견 대립이 아닌 세계관의 대립이다. 내 삶의 영역이 어디에 걸쳐있냐에 따라 주장하고 대응하는 바가 다르다. 처음 주장과 달리 뒤따르는 대응은 언제나 양쪽 모두 선을 넘는다. 조롱과 비하를 무기로 상대방의 세계를 짓밟으려 한다. 어느 쪽도 응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때때로 갈라파고스를 두고 격앙되는 논의에서는 인종차별적 언사, 이민 배척주의의 편견, 경제적 사리사욕의 메아리가 분명히 들린다.” - 배리 로페즈 <호라이즌> P400




꼬리말) 어느 한쪽의 의견을 골라야 한다면, 처음 올라왔던 청원에 반대하는, 길고양이의 삶을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하겠다. 내가 고양이와 함께 살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보단 처음 청원에 은근히 내포되어 있는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이 싫다. 인간은 자연의 수호자도 아니며, 어떤 종의 운명을 결정할 존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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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7-2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쟁은 조류 중심과 고양이 중심의 대립이 아니라 고양이 혐오와 고양이 애호의 대립이 맞지 않나 싶네요. 조류는 핑계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살처분이라는 말을 쉽게 못할 겁니다.

대굴대굴 2026-07-29 21:39   좋아요 0 | URL
혐오란 단어는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밝히지만 두 청원 어디에도 살처분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서로 대응을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말들이죠.
 

장마가 끝나고 하늘이 갰다. 저 멀리 롯데타워가 불끈 솟아오른 채 전의를 불태우고 있고, 가까이엔 남산 위로 새하얀 구름이 폭발하듯 피어오르는 중이다. 그곳에서 서서히 퍼져나가는 구름은 세상의 때를 조금이라도 묻혀낸 듯 군데군데 회색빛을 품으며 사방으로 진군한다. 이 깔끔하고 쨍한 풍경에 이토록 전투적인 표현이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 전까지 저 풍경 속에서 습도와 햇볕에 둘러싸인 채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세상에, 피할 틈도 주지 않고 어찌나 꼼꼼하게 덤벼드는지.


이봐, 고양이, 아저씨 땀구멍으로 피 토하고 죽을 뻔했어.


산 위에선, 아니, 오가는 도중에도 고양이를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그곳조차도 습도와 햇볕은 여유를 두지 않았다.


이봐, 고양이, 산꼭대기에 햇볕이 습도를 타고 폭포처럼 떨어지더라. 나 익사할 뻔했어.


심한 뻥에 스스로 생각해 봐도 염치가 없었는지 몇 마디 잔뜩 덧붙인다.


너는 집고양이라 바깥 상황을 몰라서 그래. 산고양이들은 단박에 맞장구칠 텐데. 걔네들 이미 떠내려갔는지 없더라고.


무심코 들여다본 핸드폰 주식 창은 온통 파란색이다.


이것 봐, 이거. 익사했네, 익사. 고양이, 아저씨 돈도 떠내려간다. 야, 폭우처럼 돈 쓰고 폭포수처럼 돈이 빠진다.


절대 휩쓸리고 싶지 않은, 이토록 멋진 풍경이라니.


고양이, 이번 생은 어째 글러버린 거 같은데…. 눈 예쁘게 뜨자. 그렇게 쳐다보는 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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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는 야옹 어쩌고만 운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채터링 소리는 커다란 놀람이었다. ***


까까까 가각.


채터링 하는 거야? 새 있어? 야, 잡기나 하겠냐? 쪼이지나 마라, 자슥아.


멍청한 아저씨. 나 지금 고양이별에 보낼 메시지를 새한테 전송 중이다. 내가 새한테 보내면 쟤들이 다시 고양이별로 보내주지. 그것도 모르고, 쯧쯧.


(채터링) 아저씨 어제 친구랑 술 먹고 늦게 들어왔다.

(새) 좀 더 쓸모 있는 정보는 없냐?

(채터링) 어떤 게 더 쓸모가 있냐?

(새)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채터링) 그럼 묻지를 말던가! 머리통은 조그마해가지고서.

(새) 내 머리통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랏! 혐오 발언으로 고양이별에 신고하겠다!

(채터링) 아, 미안. 뭘 그렇게 발끈하고 그러냐?

(새) 우린 저주를 받았다.

(채터링) 무슨?

(새) 태곳적에 커다란 날개만 믿고 높이높이 날아올라 신께 도전하다가 벌받았다. 새대가리의 저주를.

(채터링) 냥...

(새) 동정하지 마라. 선지자께서 지저귀시길 다시 우리의 전성시대가 올 거라 했다.

(채터링) 그게 언제냐?

(새) 바로 지금이다! 조두의 시대! 사람들을 봐라. 머리통 작은 것들이 떠받들어지고 있다.

(채터링) 그, 그렇구나. 내가 전달한 정보는 고양이별에 잘 보내는 거 맞냐?

(새) 걱정하지 마라. 그 정도도 못 할 만큼 멍청하지 않다. (푸드덕)


새대가리의 저주는 정말 무서운 거구나…. 아저씨, 나 까까 먹고 싶다! (뒹굴) 냥? 손에 든 그거 뭐냐? 붕어같이 보이는데.


붕어빵 먹어볼래? 생각보다 맛있는데. 고양이, 눈을 왜 그렇게 둥그렇게 뜨고 있는데? 걱정 마, 너 안 줄 거니까.


붕어빵이 진짜 있다구! 붕.. 붕어는 태곳적에 무슨 짓을 했길래 빵이 된 거냐? 그보다... (빤히) 아저씨는 전성기가 지나간 거냐? 머리통이…. 전성기가 아직 안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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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굉장히 신중한 편이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소심 그 자체다. 어떤 일을 할라치면, 최대한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대비해서 시작한다. 대충 시작? 그딴 거 없다. 대학 시절, 시험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싶으면 시험 자체를 통으로 날려버릴 정도였다. (이건 소심한 게 아니라... 이건 뭐지?) 그렇다고 시험을 보면 성적이 다 좋았느냐? 그건 아니다. 어차피 평범한 사람인 내겐 한계라는 게 있으니까.


올 3월인가 4월부터 ‘매일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자’라는 목표를 세웠다. 시작은 언젠가 썼듯이 AI였다. 글을 쓰고 의견을 물어보고 피드백을 받는 게 은근 재미있었거든. 하지만 여기도 내 성향이 반영돼서 안전장치를 걸어뒀다. 글은 매일 쓰되 블로그엔 한 주에 네 번만 올리는 걸로. 처음에야 매일 쓰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디 그럴 수 있겠어? 이런 의문 때문이었다. 시작한 지 3~4개월이 지난 지금, 글을 쓴 시점과 블로그에 올리는 시점이 점점 벌어져 거의 한 달 차이가 난다. 시기가 명확히 드러난 글들은 쓰자마자 올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귀찮아 그냥 순서대로 올리는 중이다. 그땐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할 줄은 미처 몰랐었다.


처음엔 내 의지였고, 내 뜻이었다. 능동적이었단 의미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의지에 속박이 된 듯한 느낌이다. 능동과 수동의 구분이 모호해진 상태다. 다행히 원래 말하는 것보단 글 쓰는 걸 더 좋아해서 억지로 밀려가는 상황은 아니지만, 사람 마음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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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흐려졌다. 비 예보가 있었는데 슬슬 비를 마중 나올 준비하는 모양이다. 오전만 해도 제법 해가 있었는데. 마루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며 기분이 우울해진다고 투덜대다 픽 웃고 만다. 외출하고 들어와서 해가 너무 뜨겁다며 불평한 게 고작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변덕이 아주. 고양이를 힐끗 본다. 베란다에 내놓은 소형 캣타워에 턱을 괴고서 잠이 들었다. 졸졸 계속 쫓아다니더니 피곤할 법도 하다. 일관되게 관심과 까까를 요구하는 녀석이다. 그러고 보면, 고양이는 변덕스럽지는 않은 건가?


사람들이 한결같음을 꿈꾼다는 건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일 테다. 그래서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를 불렀고, 파도에도 굳건한 바위를 그렸다. 사람도 그것들 같았으면 해서. 그런데 무엇을 위한 한결같음일까? 그저 존재할 뿐인 대상에 자신의 이상을 투영하면서까지 원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같은 영화 대사에 공감한다면 한결같은 사랑이나 헌신을 원했을 거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시대엔 독립 국가가 지속되길 바랐을 거고, ‘아니 되옵니다, 전하’를 외쳤던 시기엔 유교 사상이 영원하길 염원했을 거고. 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너무 뜬구름 잡나? 어떤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고양이가 캣타워에 달린 공을 잡으려고 열심히 앞발을 놀리고 있다. 같이 놀아줄까 싶어서 공을 살짝 흔들었더니만 바로 관심을 접는다. 이건, 변덕이 아니라, 청개구리 심보다. 판 깔아주면 안 하고, 이리 가라면 저리 가는.


요즘 시대에 맞는 한결같음이라면, 주식시장이 한 방향으로만 쭉 움직인다든지, 돈벌이는 상향, 세금이나 공과금은 하향 곡선을 일관되게 그린다든지. 실용적이고 괜찮은데. 세상도 변하니까 원하는 것도 변하는 게 당연하다. 내 주식이 오른 것도 아닌데 괜히 헤벌쭉 웃다가 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입을 다물고 정신을 차린다. 고양이가 또 공을 가지고 논다. 이 녀석, 이거 뭐지? 알다가도 모를 녀석일세.


꼬리말) 날씨 때문에 한 달 전에 썼던 글이라는 게 자꾸 티가 난다. 글들을 보니 한동안은 그럴 듯. 날씨 얘기를 쓰지 말야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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