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었을 땐 글을 통해서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나이 들어서도 그렇긴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고양이를 상대로 대놓고 투덜거리는데, 아마 그게 어느 정도 이유가 될 듯싶다. 분산 효과일까? ***


"야, 꼬맹이! 주먹만 한 게 어디 반백 년이나 산 아저씨 물건을. 비켜라, 그거 아저씨 의자다."

난 3개월밖에 안 살았다! 그러니 이 의자는 내꺼다!


"이 자슥이, 니가 개냐? 땅바닥에 떨어진 건 다 주워 먹고? 그거 뱉어라!"

냥, 아저씨가 잘 치웠어야지! 내가 잡히나 봐라!


"월이, 아저씨 일하러 가면 혼자 집에 있을 때 청소를 하든가, 니 밥그릇이라도 좀 닦아라."

내가 아저씨 대신 잠을 자줄 순 있다. 그러니 아저씨가 해라, 청소.


"야, 너 똥 밟았냐! 고양이는 깔끔한 동물이라며? 넌 뭔데?! 이리 안 와! 그 발로 어딜 뛰어가!"

아저씨한테 인사하러 나오다 그런 거잖아! 그러게 왜 갑자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우악! 야 이... 자고 있는데 배로 뛰어내리면 어떡하냐!"

컴컴한데 잠만 처자냐?! 나랑 놀자, 심심하다!


"월아, 아저씨 대신 네가 좀 씻으면 안 될까? 너무 힘들어서 움직이기도 싫다."

아저씨, 전생에 개였냐? 어떻게 숨 쉬듯이 개소리를 할 수가 있냐?


"월아, 아저씨 밥 좀 차려주라. 너무 귀찮다."

... 앞으로 내가 이 아저씨를 키워야 하나? 고양이별에서 그런 교육은 받은 적 없는데, 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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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늘어서 반려동물 전문 블로그가 아니더라도 고양이나 개에 관한 글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물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종종 들을 수밖에 없다. 죽다 살아난 이야기, 이별을 앞둔 마지막 기록들, 무심결에 맞닥뜨린 아기 길냥이의 죽음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자리에 묻어나는 기록한 자들의 감정들.


고양이가 내 곁에 자리 잡기 전에 죽음에 대한 관심사라면 당연히 ‘나’와 관련된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폐를 끼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면서 세상을 뜰 수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혼자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죽으면 어떡하지? 한때 고독사가 사회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살다가, 혹은 외톨이로 남아 혼자 살다가 죽고 나서 몇 달이 지나서야 시체가 발견된 사람들에 관한 기사들이 넘쳐났다. 지금이라고 해서 그런 죽음이 갑자기 사라졌을 리 없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언론이 시끌벅적했었다. 그때 대공원 그 아저씨와 나누었던 대화가 있다.


대공원 그 아저씨 : 형님, 남의 얘기가 아니에요. 형님은 그래도 조카랑 누나들이 있지만 난 완전 혼자나 다름없어요.

나 : 흠...

대공원 그 아저씨 : 이러다 집안에서 갑자기 쓰러지면 그대로 세상 뜨는 거잖아.

나 : 틀린 말은 아닌데. 좀 달라. 당신처럼 하루 15시간 이상, 주 7일 쉬지 않고 일하다 죽는 건 ‘고독사’가 아니라 ‘과로사’야. 우리, 말은 바로 합시다. 담당하는 정부 기관도 다를 걸 아마?

대공원 그 아저씨 : 진짜! 그러기에요, 형님!

나 : 은근슬쩍 고독사에 발 담글 생각하지 마. 우선 일부터 줄여. 그럼 내가 진지하게 고민해 볼게.


어느 날, 어둑어둑한 고양이가 내 곁에 눌러앉았고, 내 관심사는 고양이에게로 향했다. 내가 집에 없을 때 급사하면 어떡하지? (고양이는 아픈 티를 안 내기 때문에 겉보기에 급사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내가 먼저 죽으면 어떡하지? 때 이른 걱정이고, 어쩌면 지나친 걱정일 수도 있다. 그래도 간혹, 다른 블로그에 드리운 그림자와 맞닥뜨릴 때면 그런 생각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그 의문과 불안을 바로 해결해 줄 방법은 없다. 죽음은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았을 테니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보자 싶지만 내겐 어울리지 않는다. 나에게 맞는 건, 그저 하던 대로, 오늘도 어제처럼 온갖 감정에 휩싸인 채 살아내는 것. 그리고 농담 반, 진담 반인 듯 적절한 거리를 두며 죽음을 응시할 것. 그리고 나를 둘러싼 이 모든 삶을 치열하고 차별 없이 누릴 것.


그래서...

베란다에서 고양이와 함께 길가에 전봇대를 뽑는 걸 구경한다. 저렇게 전봇대를 통째로 뽑아낸다고? 그렇군. 고양이를 슬쩍 보니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듯 보인다. 조심스레 옆을 빠져나오지만, 어느새 고양이도 내 뒤를 따라잡는다. 자라, 고양이. 넌 잘 때가 제일 예쁘다. 언제나 그렇듯 내 말은 개소리로 전락한다. 졸졸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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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8-09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바라는 고양이의 수명은 ‘저보다 일주일만 먼저‘ 입니다.

대굴대굴 2026-08-09 10:42   좋아요 0 | URL
그것도 괜찮은데요^^
 

삶은 불확실하다... 고 생각했다. 내가 본 소설들과 영화들은 그 불확실성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보여줬다. 이게 무엇인지, 저게 무엇인지 모르겠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으니, 이도 저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어쩌면 우린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신경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행복과 가족의 평안만 추구한다 하더라도 거기 따라붙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최소한의 경제적 뒷받침과 건강한 육체와 자신들을 둘러싼 건전한 환경과 또... 그게 갖추어진다 해도 우린 멈추지 않는다. 더 좋은 경제력과 인조인간 같은 신체와... (흠, 이건 아니군.. 너무 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온라인엔 온갖 확신이 넘쳐흐른다. 저기 저 세상은 내가 사는 이 세상과 다른 곳이다. 삶은 확실하다. 이거 아니면 저거.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확신의 캐릭터로 만들었을까? 너무나 선명한 위화감에 주변을 둘러보다 둥그런 모양 바구니에 들어가 자는 중인 고양이를 발견한다. 이 녀석의 삶도 우리 집에 들어온 이후부터 나름 확실해졌다. 무엇보다 녀석이 원하는 건 관심과 까까뿐. 아저씨의 장난기와 변덕이 삶의 불확실성을 조금 높일 수 있겠으나 그 정도는 잔잔한 연못 표면을 스치는 산들바람에 불과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게슴츠레 눈을 뜨는 고양이.


어이, 고양이, 너 확신의 유튜버가 돼라. 너한테 딱 맞는 직업이다.


또 헛소리하는구나 싶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잠을 청한다. 나에 대한 파악을 거의 100% 완료한 듯싶다. 아, 확신의 유튜버가 되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원하는 건 관심과 까까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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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산을 오를 때마다 땀으로 범벅이 된다. 정상에 도착하면 그 어느 때보다 지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덥고 갈증 나고 힘들고. 그나마 다행인 건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점. 올라오면서 살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주변을 돌아본다. 없다. 내가 찾는 건 주로 삼색이다. 못 본 기간이 길어지면 모지리와 조그만 고등어도 찾지만, 그래도 삼색이만큼은 아닌 거 같다. 최근엔 고양이 자체가 보기 어렵다. 워낙 덥다 보니 햇볕에 노출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인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삼색아~’ 외쳐보고 싶지만 그런다고 알아들을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사람 어른 꼴을 하고서 산 정상에서 그러고 있음 다들 무서워할 거 같아서 참는다. 세상이 세상인지라.


털레털레 산 중턱을 지나 동네 경계 부근 공원을 지나는데 느닷없이 들려오는 소리. ‘뭐 하는 거야?’ 약간의 놀람과 당혹함이 뒤섞인 아주머니의 목소리다. 삼색이의 실종으로 혼미하던 정신이 간신히 목표물을 포착한다. 아주머니 한 분과 할머니 한 분. 할머니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 벤치에 앉았고, 아주머니는 그 할머니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건넨다. ‘뭐 하게, 뭐 하려고?’ 터덜터덜 걸어가며 그저 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있었는데, 보이는 각도가 달라지자, 할머니의 바지가 엉덩이께로 내려와 있는 게 보였다. 아! 상황 파악과 함께 달려드는 복잡한 감정들. 아주머니는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 웃으며 말한다. ‘잠깐만 일어나봐요.’ 몇 초 간의 짧은 상황을 돌이키며 생각한다. 치매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급한들 벤치 바로 앞에서 볼일을 보려 하진 않았을 테니까. 아주머니의 만류에 배시시 웃던 할머니의 미소가 머릿속에 각인된다. 무엇인가 빠져나간 존재를 향한 안타까움과 안쓰러움과…. 그런 미소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데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포착해서 갈무리하는, 이 무의식적 작용의 원인은 바로 그리움. 쳇.


뒤따라오며 처음 울음소리를 들려주던 때. 먹을 거 더 내놓으라고 야옹거리며 한참을 뒤따라오다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던 때. 어른 고양이를 보자, 부리나케 도망쳐 자취를 감추던 때. 그리고….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온갖 기억 속을 떠돈다.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아니, 다신 못 보지. 아니, 아니, 그 사람 말고. 하, 확실히 난 반환점은 돌았어.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그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끊임없이 의식하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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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더위가 남달라진다는 느낌이라 다음 토요일엔 어떤 얘기를 할지 모르겠지만 지난 토요일 더위는 색달랐다. 일을 하다 보면 매장 밖으로 잠깐이라도 나갔다가 들어올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의욕이 한풀씩 꺾였다. 뜨거움도 뜨거움이지만 기다렸다는 듯 몸을 휘감는 습도 때문이다. 몸으로 스며들어온 습기가 내부의 의욕마저 희석한달까. 한 번 꺾인 의욕을 에어컨으로 되살려보지만 그때뿐이다. 이런 느낌을 가져다준 더위는 이번이 처음이지 싶은데.


일요일. 어제 하루 겪었다고 그나마 낫다. 온도나 습도가 어제보다 좋아진 건 아니지만 의욕이 꺾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밝은 표정으로 이 공기 속을 활보할 순 없었다. 얼굴은 절로 찌푸려진 채 발걸음은 터덜터덜. 머릿속 사고회로가 물에 잠긴 듯 허우적대다가 뜬금없이 무언가 하나를 건져 올린다. 끊임없는 자극에 분노와 좌절이 몰아치던 그 어떤 시절을. 그때 내 삶이 뜨거웠었나? 아니, 차가웠던가? 온도 때문에 떠올린 건 아닌 모양이다. 아마도 피할 수 없는 이 긴 여름 때문일 것이다. 얼른 문을 열고 매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도 그랬다. 내 안으로, 내부로 피해서 가라앉았었다. 그뿐이었다. 매장 내부 시원함 같은 건 내 안에는 없었으니까. 지금이, 이 여름이 그 시절에 비하면 천국이구나.


월요일. 이번 주 중부지방은 기록적으로 더울 거라 했다. 밖에 나가 몸으로 실감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고양이가 아침 햇볕을 피하는 중이다. 이 시간이면 마루 베란다 타일 위에서 배회할 녀석이 오늘은 마루 중간쯤에 주저앉아서 햇볕을 가늠한다. 오전 9시에 30도라. 집안일하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0시 반쯤 에어컨을 켠다. 부엌 창가에 찌그러져 있던 고양이가 그제야 베란다로 쪼르르 달려간다. 공기가 시원해질 테니 햇볕을 쬐겠단다. 집고양이라면 에어컨의 효용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따 산에 가야 하나? 못 돌아오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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