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도 제사를 지낸다. 결혼을 안 했으니, 자식이나 며느리, 사위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제사에 대한 내 생각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지만, 내 부모님 땐 거의 절대적인 관념이라 그분들의 뜻을 따르고 있다. (언젠가 적었지만 난 늦둥이로 태어났고, 부모님 모두 1920년대 출생이다) 그 얘기는 1년에 한두 번씩 수십 년에 걸쳐 제사상을 지켜봤단 의미다. 그런데 지금도 내 상차림은 그때마다 모양새가 다르다. 음식의 위치와 방향이 있지만 잊어버린 지 오래다. 이젠 쉬이 가르쳐줄 사람도 없다. 다행히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니 그걸 찾아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제사의 방식이나 상차림은 집안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띤다. 그러니 내가 큰집 형님에게 굳이 연락해서 물어보지 않는 한, 우리 집 제사상의 모습은 앞으로도 천차만별일 예정이다.


정보 단절의 예로 제사를 들었지만, 사실 제사는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우리 주변에서 밀려나는 중인 행사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이것도 언젠가 적었지만, 우리 어머니는 서울의 교통체계가 현재처럼 바뀌던 순간, 흐름을 쫓아갈 자신감을 상실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변화의 속도가, 특히 전자기기로 인한 변화의 속도가 어지러울 만큼 빨라졌다. 앞으로 어느 시점엔 어떤 기기를 다룰 수 있는지에 따라 한 세대를 구분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세상이 그렇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엔 그 파장이 너무 클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나이 든 사람이 전자 기기를 통한 의사소통의 뉘앙스를 직접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경우 앞으로 사라지게 될 지식의 저장고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또한 인류 역사에서 지배적 사회가 학살이라는 방법 대신 해당 문화에 속한 연장자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어린이들을 집중적으로 개조함으로써 작은 문화를 말살한 붕괴의 과정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 배리 로페즈 <호라이즌> P345~346


지역 문화와 국가의 정체성보단 디지털 문화와 디지털 정체성이 특정 세대를 하나로 묶어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되면 경제력에 따른 지역별 경계와 출생 연도에 따른 시간별 경계가 훨씬 중요해지겠구나. 이미 그런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신의 은총만을 바라던 시대는 지났다. 지극히 불손하고 신성모독에 준하는 발언 같지만, 인간의 이해타산은 그러고도 남을 만하다. 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사람에게 겸손함보다 오만함을 부여했고, 그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 자들조차 인간을 알게 모르게 생태계의 최상단에 놓았다. '만물의 영장.' 요즘은 이런 표현 잘 안 쓰지만 한때 기고만장함의 극치를 달리던 사람들이 두루 썼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을 밑으로 끄집어 내렸다. 바벨탑을 쌓는 건 시대착오적이니, 필요할 때만 찾던 평등을 내세워 신을 인간의 영역으로 강등시킨 셈이다. 그러니 자리를 바꾼 신도 이제 책임을 져야 했다. 세상이 힘들고 불평등하며 부조리할 때 당신이 만든 세상이니 당신도 책임을 지라고, 뭐라도 말을 해보라고 사람들은 요구했다. 신은 응답했을까?


호주의 철학자 발 플럼우드는 어디선가 현재 인류의 과제는 “인간 이외 존재들을 윤리의 영역에 재배치하고 인간을 생태의 영역에 재배치하는 것”이라고 썼다. - 배리 로페즈 <호라이즌>, P453, 454


요즘 세상은 자유와 권리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이다. 개인에 초점을 맞춘 문명이라 그럴 것이다. 개인을 억압하고 짓누르면 그 집합체인 사회도 억압하고 짓누르는 꼴이 될 터이니 모든 것의 기반인 개인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 개인이 모두가 똑같을 리 없다. 우린 보편적 개인을 상정하고 그에 맞춰 어떤 원리를 적용하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쪽에 자리한 평등과 의무 또는 책임을 위한 무게추를 고려하지 않으면 저울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질 게 뻔하다. 결국 개인은 ‘나’만 존재하고, 공동체는 흔들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진작에 그런 상태였을 지도 모르겠다.


신은 사람들의 줄기찬 질문과 힐난에 답했을까? 아마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 한 순간의 쉼도 없이 외쳤을 것이다. 자유와 권리만큼,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염치는 있을 만큼만 평등과 책임을 생각해 보라고. 제발 좀 귀를 열라고. 우린 언젠가부터 원하는 답만 듣는 재주를 부린다. 그래서 우린, 너희들 꼬락서니부터 살피라는 신의 비꼼도 안중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자영업을 하면서 깨달았던 건, 가장 큰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출몰한다는 점. 사실 매장을 운영하는 사장과 직원 사이에 일을 향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는 건 당연하다. 사장은 생계나 다름없는 일에 모든 것이 얽매이지만, 직원은 아니다 싶으면 떠나면 되니까. 그런데 여기서부터 파생되는 책임감이나 열정의 차이가 업주 처지에선 참으로 치명적일 때가 있다. 조금만 조심했으면, 조금만 사려 깊었으면, 조금만 참았으면 거기서 멈출 상황이었는데, 그러지 않음으로써 일이 크게 번진다. 물론 대부분은 업주 관점에서다. 직원은 그만두고 나가서 다시 안 보면 그만이다.


장사를 하던 십수 년 동안 내가 봤던 사달은... 쳐다봤다고 분을 못 이겨 손님과 진심으로 물건 집어 던지기 놀이를 하거나, 출근 첫날 교육 중에 아무 말없이 출입구 앞에 유니폼 벗어 던져놓고 사라지거나, 선임자의 교육을 고까워해 바로 그만두고 가 버리거나, 자신은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지만 외국인 근로자를 대놓고 무시하거나,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매장 카운터 앞 공간에 모여 앉아 친목을 다지거나. 신규로 채용했지만 연락도 없이 안 나오는 건 일상다반사였고, 퇴근 후 메시지로 내일부터 못 나간다고 통보받은 경우도 수두룩하다. 처음엔 기가 차서 연락도 해 보고 설득도 해 봤지만, 어느 순간부턴 그러려니 했다. 그 이후 내게 돌아오는 건 업무량의 폭주. 하루 3시간씩 자면서 두 달 가까이 일해보기도 했고, 명절 연휴엔 48시간을 매장에서 보낸 적도 있다. 잠이 부족해 지하철에서 서서 졸다가 무릎이 꺾여 바닥에 넘어져 보기도 했다. 창피? 일어서서 손잡이 붙들고 다시 조느라 그런 거 느낄 새도 없었다.


당연히 선물 같았던 좋은 근무자들도 많았다. 반대로 쓰레기 같은 업주들도 많다는 것 역시 안다. 하지만 모든 경험을 압도하는 기억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빌어먹을 기억들. 지금은 장사를 때려치우고 남의 밑에서 일하지만, 바로 그 ‘남’이 겪는 최근 상황들이 남 일 같지 않아 예전 일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자영업자들 대부분은 미래의 건강을 현재로 끌어와서 쓴다. 그만큼 육체와 정신을 혹사하기 마련이다. 부디 현재와 미래의 균형을 잘 맞추었으면 한다. 빌어먹게 날씨도 다시 한여름으로 회귀했다. 더위와 기억이 서로 뒤엉켜 만든 진흙탕에 발이 빠진 채 머리만 긁적이는 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 사람 아기가 손에 쥔 모든 걸 일단 입에 넣으려 하듯이 이 녀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끈, 고무줄, 먼지, 벌레. 컴컴한 새벽,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서 녀석을 쫓아 뛰어다닌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입가에 붙은 먼지 한 움큼을 빼앗았고, 실오라기를 입에서 쭈욱 잡아 뺀 적도 있었다. ***


(힐끗. 뒹굴) 아함, 졸리다. (힐끗. 뒹굴) 아저씨, 나 졸린 거 같은데...

(아저씨는 열심히 TV 보는 중)

(슬금슬금) OK. 잘 빠져나왔음. 아까 저 방 책상 위에 뭔가 예쁜 게 있던데. (부스럭) 오, 여기 있다. 이게 뭐냐? 음, 여기선 아저씨가 보이는데. 이거 가지고 저쪽 방으로 가야겠다. 거기서 맘 놓고 살펴봐야지. 일단 입에 물고….

(슬금슬금) (움찔. 슬쩍 돌아본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저씨 다시 TV 시청) 아 씨, 깜짝이야. 조심해서... !

(아저씨,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네발짐승처럼 덤벼듦) 우악, 엄마야!!

(두두두) (고양이 도망, 아저씨 추격) (두두두) (고양이 반대 방향으로 도망, 아저씨 또 추격)

(방구석에서 잡힘) 우와, 놀라라... 간 떨어질 뻔했다, 냥.


"야, 너 입에 물고 가던 거 고무줄이지? 어쨌어? 삼켰어? 벌써 먹은 거야?"

아니, 아니. 아구, 심장이 다 쫄깃쫄깃하네. 저기...

"어쨌냐고?! 너, 그거 먹으면 병원 가야 돼!"

아니, 그거...


(아저씨, 고양이 버려두고 열심히 바닥 수색 중. 실패. 집안에 불 다 켜고 다시 열심히 바닥 수색 중. 또 실패.)


"진짜 삼킨 거야?!"

...


(아저씨, 이번에 네 발로 기어다니며 바닥 밀착 수색 중.)


"어, 여기 있네?"

아저씨가 네발로 뛰어오를 때 이미 놀라서 떨어뜨렸거든.

"바로 떨어뜨린 모양이네. 먹은 줄 알았잖아... 미안, 미안."

아저씨, 네 발로 잘 다니던데 저쪽에 좀 엎드려 뻗쳐볼까? 내가 할 말이 많은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빗소리에 깨서 열어둔 창문을 닫은 게 오전 6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시 잠들었다 8시에 일어나서 아침 일과를 마치고 기진한 채 고양이 옆에 드러눕는다. 아우, 허리야. 관절로 인한 중얼거림은 이젠 거의 자동 반사 수준이다. 고양이는 간식을 주지 않아서 살짝 새초롬한 상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줬잖아. 조금만 더 있다 먹어라.


천장을 보고 누워 있으니, 빗소리가 들린다. 정확히는 배수관으로 빗물이 흘러 내려가는 소리, 보일러 연통에 빗물이 투닥대는 소리. 거기에 제습기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고 소리가 스며들고, 옆집 베란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침범한다. 고양이, 아무리 생각해도 낭만적인 느낌은 없다. 그렇지 않냐? 도시에서 낭만은, 죽기 좋은 날씨구나, 같은 살기등등한 말투에서나 찾을 수 있는 걸까? 대굴. 고양이가 아니라 내가 뒹구는 중이다.


고양이, 아저씨 점심 좀 차려주면 안 될까? 비가 오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말하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이 녀석은 비가 오든 말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녀석인데. 다시 침묵. 부엌 창을 올려다보니 비 때문에 시야가 흐릿하다. 그 와중에 산을 배경으로 뿌옇게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귀신 나오겠네. 고양이, 지옥이 꽉 차서 터져버리면 그곳에 있던 혼이 비로 내렸다 다시 증발할 때 저런 모습일까? 힐끗 쳐다보다 고개를 돌린다. 고맙게도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한 번씩 쳐다봐 주기는 하는구나. 어이, 고양이. 힐끗. 장난기가 발동한다. 어이, 고양이. 힐끗. 어이, 고양이, 고양이. 빤히. 너희한텐 뭐가 들리고 뭐가 보이니? 알 수가 없네. 대굴. 이번에도 내가 구른다. 점심을 노리는 아저씨와 까까를 노리는 고양이가 대치 중이다. 이건 너무나 뻔한 승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