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단편집이다.  그래서인지 『탐정클럽』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2010년경에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역시 탐정들이 문제를 해결해내는 추리단편집이었다.  물론, 그것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비정근』은  『탐정클럽』과 『신참자』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아마, 책 표지를 제한후에 하드커드에 잇는 일러스트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비정근』에 나온 이미지와 많이 비슷하니 말이다. 이 작품은 1997년에 발표한 초기 작품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풋풋하고 깔끔한 단편들이 읽는 재미를 솔솔 느끼게 해준다.

 

 

 

나는 천성이 일하기를 싫어한다. 돈은 없어도 괜찮으니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고 싶다. 말이 나온 김에 털어놓자면 교사라는 직업도 좋아하지 않는다.  대학 3학년 때 취업활동에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방향전환을 했던 것뿐이다. (p.9)

 

  대놓고 천성이 게으르다고 말하는 스물다섯 살의 '나'는 미스터리 작가가 되는 게 꿈이지만, 원고 집필 시간을 확보하기에 좋은 직업이어서 초등학교에서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다. 기간제 교사는 정교사가 출산이나 병가로 휴직을 해야 할 때 대체교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성격은 건조한데 상대가 아이들이라고 다르지않다. 사실 교사라는 직업도 좋아하지 않고, 당연히 교육에 대한 특별한 사명감도 없는 '나'는 그저 무리하지 말고 무사히 석 달을 넘기는 것만을 바라는 사람인데, 그가 파견되는 학교마다 괴이한 사건이 발생한다.  여교사가 학교체육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독극물 테러 사건이 발생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초임 교사가 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나니, 사건을 몰고다는 '기간제 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정규직 교사는 학교 관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인이다. 교육자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도 인정받지 못하지만 실수라도 하는 날엔 가차 없이 잘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적당히 몸을 사리며 버티는 요령을 터득한 주인공에게 심상치 않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사건마다 교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방법으로 추리를 전개해 나간다. 주인공은 자기 반 아이들을 아무 생각 없이 날뛰는 ‘방약무인한 원숭이’라고 부르며, 어리다고 봐주지도 않는, ‘따뜻하지 않은, 비정(非情)한’ 교사이지만, 자기 반에서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별 관심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아이들에게 툭툭 던지는 말들은 비정한 교사가 아니다.

 

사람이란 말이야, 당연히 호불호라는 게 있는 법이야. 하지만 확실한 건, 사람을 좋아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주 많지만, 싫어해서 얻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거야. 그런데 굳이 싫어하는 사람을 찾아낼 필요는 없지 않겠어? (p.152)

 

  제1장 6×3 / 제2장 1/64 / 제3장 10×5+5+1 / 제4장 우라콘 / 제5장 무토타토(ムトタト) / 제6장 신(神)의 물 // 방화범을 찾아라 / 유령이 건 전화 로 목차가 되어 있는데, 1장에서 6장까지는 '비정근'교사인 '나'의 이야기 이고, '방화범'과 '유령이 건 전화'의 이야기는 초등학교 5학년인 고바야시 류타가 사건을 풀어내는 이야기다.  일본어의 오류로 인해서 해결이 안되었던 사건들도 있지만, 초등학교 비정근 교사의 특징답게 아이들의 소소한 글씨 실수를 쪽집게처럼 찾아낸다. 1997년도 작품인데, 일본의 초등학교 모습은 지금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인기투표 대신 '우라콘'을 만들어 내고 '스포츠 도박'을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아이들 답게 순수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글자를 틀리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게 바꾸기도 하니 말이다.  5학년인 고바야시 류타의 이야기는 딱 그나이 아이들 이야기 같아서 풋풋하게 다가온다.

 

  단편 모음집 이기에 어디서부터 책장을 펼쳐도 부담감 없이 재미있다. 굉장한 추리를 원한다면 한번쯤 갸우뚱거리면서 생각해봐야겠지만, 단순히 히가시노의 초기작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만 가지고 읽기 시작하면 충분히 매력적이다.  『신참자』를 떠올린다면 그 느낌이 어떤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볍게 읽을 수 있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내가 알고 있던 작가가 아닌 새로운 작가의 글을 만난 느낌이랄까?  너무나 거대해져서 범접하기 힘들것 같은 이도 역시 병아리 시절은 있었으니까 말이다.  풋풋한 히가시노 게이고를 만날 수 있는 책, 『비정근』은 그래서 읽을 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빨강 - 제11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87
김선희 지음 / 사계절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댁에 갈때마다 먹는 음식이 있다. 맵디 매운 '용두동 쭈꾸미'.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 아니 전혀 먹지 못하는 나에게 매운 쭈꾸미요리는 고통이었다.  맛을 느끼기 전에 맵다는 아픔이 먼저 다가오고 함께 자리를 해서 음식을 먹는 가족들을 보는 것 역시 통증으로 다가오곤한다.  모두가 맵디 매운 쭈꾸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족은 모이면 쭈꾸미를 사와 집에서 먹곤한다. 남편의 누나, 시누가 너무나 좋아하는 음식이라 '용두동 쭈꾸미'는 명절이면 빠지지 않는 우리집 음식이다.  언니는 매운음식을 굉장히 좋아한다.  청량고추장도 태양초 고추가루로 만든 고추장에 푹 찍어 먹곤 하는데, 어찌나 매운음식을 좋아하는지 위에 문제가 생겨 매운 음식을 먹지 말라는 의사 소견을 듣고도 매운음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시누를 언니라고 부를만큼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남편보다 언니가 더 좋아진 후에야 언니가 왜 그렇게 매운 음식에 집착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현실이 고달프고 힘이 들수록 언니는 맵고 매운 음식이 땡긴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땀이 나도록 매운 음식은 고통을 안고 오는 것 같지만, 그 순간 만큼은 어떤 잡다한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래서 언니 생각이 난다. 열여덟 대한민국 청소년 '길동'을 만나면서, 생각 난 인물은 언니였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길동을 만나보자.  한국인이라면 '길동'의 이름을 듣는 순간 허균의 '홍길동'이 생각나는게 자연스럽지만, 길동의 성은 '길'이고 그냥 이름이 '동'이다. 외자 이름이라니 근사하다고 해야하는데, 이 친구의 삶이 참 쓰게 다가온다.    

 

 

 

  2년 전, 길동의 아버지는 이삿짐을 옮기다 사고를 당했다. 한 달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아버지가 깨어 났지만,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한순간 일곱 살 막내가 되어, 자신의 아내를 ‘엄마’, 큰아들 명이를 ‘큰형’, 둘째아들 동이를 ‘작은형’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버지는 심심하다 싶으면 지붕 위에 올라가 말을 타기 시작한다. 가정경제를 위해서 엄마와 형이 치킨집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쉰아홉의 일곱 살 막내를 돌보는 건 길동의 몫이 되어버렸다. 열여덟의 육아 스트레스라니.  이 스트레스와 열여덟 나이의 주체할 수 없는 왕성한 호르몬을 해결하기 위해서 길동은 밤마다 '야동'을 본다.  중학교 남학생들도 자연스럽게 보는것을 열여덟 호기심 왕성한 청소년에게 막을 수는 없으니 당연하게 넘어가자.  이렇게 육아 스트레스로 정신 없는 길동에게 '오미령'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다.

 

  청양고추를 껌씹 듯 잘근잘근 씹어 낼 만큼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아이. 매운 건 딱 질색이지만 미령을 만나기 위한 방법으로 길동은 미령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더 빨강-고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식도락 모임’에 가입한다.  모임 멤버들의 매운맛 사랑은 보통 사람, 길동에게는 근접하기 힘들지만, 사랑의 힘은 얼마나 대단한지, 매운걸 못먹는 길동을 변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이 모임의 진짜 모습은 매운것을 좋아하는 모임이 아니란다.  길동은 어떻게 해야할까?  일곱 살이 되어 버린 아버지를 돌보는 것도 힘이든데, 자살모임의 수장인 여자친구까지 신경써야 하다니 정신이 없다.  이럴 땐 멀찌감치 한발 뒤로 빼야 할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또 인생이 아닌가?  그뿐이 아니다. 불행은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이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서 툭 튀어나오고 저기서 튀어나오고 열 여덟 아이를 샌드백도 아닌데 너무 쳐된다. 이 아이가 의지할 곳 조차도 없게 말이다.  

 

식구들 생각이 났다. 일곱 살이 되어 버린 아버지, 떠나 버린 형, 지난한 삶의 현장 속으로 다시 뛰어든 엄마.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지만, 그전보다는 다른 형태의 결속으로 맺어질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별로 행복해 본 적이 없는 가족이고, 함께 나눈 즐거움이나 행복보다는 함께 나눈 고통이 더 많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단단해진 가족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하는 확신. (p.187)

 

  형에게는 폭력적이었고, 엄마에게는 신경질적인 잔소리꾼이었고, 길동에게는 무관심했다가 아이가 되어버린 아버지.  죽음과 친해지고 싶어하는 여자 친구. 짧은 호흡이기에 편하게 읽을 수 있는『더 빨강』은 청소년 소설답게 통통 튄다.  매운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카페 주인장을 꼬셔볼 목적으로 카페에 가입한 소년과 그 주변인물들의 이야기. 폭력적이었던 아버지가 아이가 되어 가족을 의지하는 이야기.  심사위원들의 말처럼 십대 소년의 자연스러운 본능인 ‘성욕’과 어린아이로 돌아간 아버지의 ‘동심’, 그리고 매운맛에 집착하는 소녀의 이야기가 ‘빨강’이라는 이미지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더 빨강』은 매운 음식이 당기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목마'를 통한 가족의 이야기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다. 여러가지 양념들이 적절하게 들어가 맛있게 맵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고 있는 주부들에게 김선희 작가의 『더 빨강』은 자꾸만 손이 가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책이다. 참, 맛있게 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1년 초에 박완서님이 요단강을 건너신 후 선생님의 작품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이곳저곳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했던 작품들이 간간히 나오긴 했었지만, 이렇게 선생님의 글만으로 선생님을 느낄 수 있는 글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뿐이다.  대단한 작가이셨으니 선생님의 미 발표 작이 한두편이 아니라고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 가을 이렇게 선생님의『노란집』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노란집'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되었다.  고흐의 노란집이 아담한 노란집이 아니 듯, 선생님이 사신던 '노란집'도 작은 오두막같은 집은 아니다. 알면서도 책을 읽는 내내 작고 아담한 집을 떠오르게 만들고 그런 집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집에서 쓰신 글이라고 박완서 작가님의 따님인 호원숙 작가가 서문에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지금은 그곳을 찾는 이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얼마전에도 『노란집』출간 이벤트로 많은 분들이 노란집을 찾으셨고, 그곳에서 호원숙 작가의 목소리로 박완서 작가님의 글이 낭독되었다는 글을 읽은적이 있다.  사진으로 본 '노란집'은 내 머릿속에 그려졌던 집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마도 사진으로 보기전에 『노란집』을 읽으면서 호원숙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상사화 꽃대와 나무수국 흰빛과 목백일홍 붉은 꽃송이들이 옛 시골집의 모습을 떠오르겠 했는지도 모른다.  『노란집』은 6개의 굵은 줄기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들만의 사랑법 / 행복하게 사는 법 /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 내리막길의 어려움 /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쓴다 / 황홀한 선물 까지 단편소설과 에세이로 짜여져 있다.  서문을 읽고 만나게 되는 '그들만의 사랑법'은 읽으면서 갸우뚱하게 만들어 버린다.  영감님과 마나님이 사랑하는 모습과 한여름 낮의 꿈을 꾸는 모습까지 짧은 단편들은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  갸우뚱했던 이유는 단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란집』이 작가 생전에 살던 집임을 모르고 읽었기에 제목 그대로 '노란집'에 살고 있는 노부부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60여장으로 영감님과 마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끝이 나 버리는것이 아닌가?  아니, 그래서 헷갈린것이 아니었다.  '행복하게 사는 법'을 시작으로 '황홀한 선물'까지 작가의 어린시절과 칠십대의 삶까지 한데 어우러져 보여지고 있는것이 에세이인지 단편인지 구분이 안가게 만든다.

 

  분명 단편을 읽고 있는데 옆집 노부부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작가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작가가 노년이 되어 보여주는 삶을 읽으면서 타인의 삶을 그린 단편인가 하고 빠져들게 만든다.  그만큼 작가의 솜씨는 호원숙작가의 서문처럼 휘모리 장단마냥 휘어감고 풀어주고를 능수능란하게 하고 있다.  그녀가 누구인가?  박완서... 큰 아이의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는 '자전거 도둑'의 작가.  그래서 모르는 이가 없는 작가가 박완서 작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노란집』은 박완서님의 82회 생일을 기리는 때에 출간되었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살아있지 않아도 그녀의 작품들은 계속 숨을 쉬고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녀가 마치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들려주는 이야기들. 조곤조곤 할머니가 어린 손주에게 들려주 듯 『노란집』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다.

 

'내가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삶의 가장 긴 동안일 수도 있는 노년기. 다만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삶에 대한 모독이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삶에서 소설이 나올 수는 없다.'  (p.212 ~ 213)

 

  죽도록 현역작가일 수 있었던 분. 그녀의 삶이 그랬듯이. 삶을 사랑하기에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에 모든 부분이 살아서 숨쉴수 있었다. 노년의 느긋함과 너그러움. 따스함. 그러면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어린시절과 손주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현실과 비현실적인 모습들. 그래서 이야기를 한다.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이다.  스무살에 만났던 박완서 작가와 마흔이 넘어 만나는 박완서 작가가 다르듯  나 역시 그녀의 나이가 되면 또 다른 것이 보이고 이해될 것이다. 『노란집』1장에 쓰여진 영감님과 마나님의 이야기는 2001년~2002년 계간지 「디새집」에 소개했던 글들이란다.  단편과 에세이가 괴리감 없이 읽히는 이유는 작가 역시 마나님의 나이가 되어 자신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시절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재우면서 해 주시던 그녀의 어린시절 이야기.  여학교 시절의 이야기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어떻게 컸고, 그녀는 어떻게 지냈었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들.  할머니의 할아버지가 주시던 사랑에 대해서, 할머니가 다니던 대학시절에 대해서, 글이 고파 글을 쓰고 작가가 된 이야기와 아치울로 이사와 그 곳에서 만났던 새로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고 또 사라지는지를 말이다.  『노란집』은 따스한 책이다. 작가의 글과 함께 보여지는 삽화는 씽긋 웃게도 만들고 눈물이 글썽이게도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열림원>에서 삽화를 한데 모아놓은 것이 있어 같이 올려본다.  '노란집'과 그 속에 담겨진 이야기들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height=438 src="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C485DF5AB4E387F0EEC09C7C5F97885BFB1D&outKey=V127ca08cc0beecda151b23ec7705e8c1204b88d9c4eec88173a923ec7705e8c1204b" frameBorder=no width=720 scrolling=n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무게』라고 읽었는데, 영문이 'HEFT'다.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을 몰랐다.  작가의 글을 읽다보니 처음 생각한 제목은 'Everyone's sons'였다고 한다.  영어로 읽을 때 각운이 잘 맞긴 했지만 발음하고 기억하기 다소 어려워 책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 하나를 생각해낸 것이 바로 'Heft'였고, 이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1. 무게, 중량  2. 중요성; 세력, 영향력  3. 대부분; 주요부, 요점으로 되어있고, 작가 역시 'Weight'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짐이 되는 것,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복잡하고 힘겨운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뜻인 진지하고 심각하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앞의두 가지 의미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처음엔 책 표지나 제목이 요즘 흔하게 나오는 것처럼 달달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아서 소설이라는 생각을 못했었다.  책을 받고 손이 가기까지 조금은 더디게 걸렸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 책 대박이다. 재미도 있고 작가의 말처럼 두 주인공들이 견뎌내야하는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내가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집 밖에 나간 때가 2001년 9월이었어요.'(p.16)라고 편지글을 쓰고 있는 아서는 쉰여덟의 은퇴한 대학교수로 250kg에 달할 만큼 뚱뚱한 남자다.  아서가 유일하게 소통을 하는 것은 온라인 쇼핑을 제외하고는 대학교수 시절 자신의 학생으로 만났던 샬린 터너와의 18편 간의 편지 뿐이지만, 편지로만 세상을 만나는 아서는 진실되지 못하다.  예전 싸이나 페이스북처럼 모든 현실이 아닌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숨겨오던 아서에게 샬린으로 부터 그녀의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달라는 연락을 받게된다.

 

  현실의 눈으로 아서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아서는 부자인 데다가 유명한 건축가인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아름다운 가구와 책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  그런 그가 10년이 넘도록 세상밖은 커녕, 문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자신의 집 이층에도 올라가 본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아서는 이제 샬린에게 진실을 말하고 샬린과 샬린의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기 위해서 아서는 자신의 집을 청소하기 위한 사람을 고용하게 되면서 욜란다가 오게 된다.  혼자만 있을때는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집에 찾아온 낯선 타인은 자신이 고용주임에도 불편하고 어렵게 다가온다.  그녀를 돌려보내야만 할까?  아니, 그냥 두는게 좋은 것일까?  먼지쌓인 이층과 쥐가 튀어나오는 주방.  이 모든것이 어린 도우미 눈에 보여지고, 아서는 불편함과 창피함을 함께 느낀다.

 

  '내 오래전 기억 속에는 나처럼 이름이 켈인 아버지가 있다. 우리 성은 켈러다. 아버지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주었고 자신의 야구공을 주었으며, 내가 네 살 때 애리조나 주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켈 켈러다.'(p.113).  켈의 이야기의 시작이다.  용커스라는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는 열입곱 살 켈 켈러는 엄마의 고집으로 부자 동네, 펠스 랜딩의 학교로 오게된다. 자신이 살던 곳과는 전혀다른 곳 그곳에서 켈은 불쌍하고 외로운 고등학교생다.  네 살때 사라져 버린 아버지, 술로 인해 대머리가 되어가고 자신보다 무거운 몸이 되어가는 망가진 엄마의 모습, 제대로된 부모와 좋은 집과 차를 가지고 있는 학교 아이들의 모습은 켈을 더욱더 외롭게 만들지만, 뛰어난 운동실력과 야구실력으로 메이저리그를 꿈꾸지만, 엄마는 켈이 야구가 아닌 대학을 가기를 희망하면서 켈의 대한 진학에 도움이 주기위해 아서에게 전화를 건다.

 

  18년 만에 걸려온 샬린의 전화는 아서의 삶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샬린이 보내온 한장의 사진으로 샬린의 아들이라는 켈에 대한 생각은 켈을 맞이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전환된다.  오랜 세월 먼지에 뒤덮여 있던 자신의 집을 청소하기 위해 찾아온 어린 청소부 율란다.  이제 아서는 샬린과 켈을 기다리면서 율란다와의 대화를 시작한다.  자신의 삶이 아닌 어린 청소부의 삶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녀와 힘겨운 산책을 통해서 오랜시간 스스로 갇혀있던 집이라는 은신처에서 한걸을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아서의 독백이라고 생각했던 글은 어느새 켈과 샬린의 이야기를 펼쳐내다가 율란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아서와 켈의 이야기지만, 현재의 이야기만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다.  아서의 과거와 켈의 네살때의 기억. 그리고 샬린의 야간 대학시절의 기억. 

 

  아서, 켈 그리고 샬린은 기억속에서 사는 인물들 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다.  책의 중반부로 넘어서면서 최대 관심사는 켈이 누구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다.  켈의 이름이 '아서 켈 캘러'라고 밝혀지면서 아서와의 연관성을 찾게되고, 샬린의 죽음 이후 샬린의 편지는 켈의 정체성마저 혼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샬린이라는 다리가 이어놓은 아서와 켈.  작가 리즈 무어는 어느 한쪽도 기울이지 않게 적절하게 아서와 켈에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쉰여덟의 은퇴한 교수의 이야기와 청춘의 반항을 시작한 열일곱 아이의 삶의 모습을 말이다.  켈보다 어린것 같은 아서와 삶의 무게로 열일곱 같지 않은 켈.

 

  책을 잡기 전에는 표지에서 오는 묵직함으로 인해서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이라는 제목 역시 쉬운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기우였다.  아서의 편지글로 시작되는 글은 아서와 켈, 그리고 율란다의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버린다.  상상 이상이었다.  끔찍하게 쌓아놓은 음식을 먹는 장면도 아이들의 일탈 장면도 거부감보다는 이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구나 하는 느낌으로 다가왔고, 아서와 켈의 만남을 그리고 희망하게 만들어 버린다.  작가는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아서에게도 켈에게도.  삶의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야기 속 주인공들도 여러사람이 함께 하는 인생이라는 바다속에선 그 자신만이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모두가 자신의 삶에선 주인공이니 말이다.  아서와 켈, 샬린과 율란다, 심지어 율란다의 남자친구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누구도 좌지우지 하거나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오로지 그들의 삶일 뿐이니까 말이다.  다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인생을 배울 뿐이다.  내 인생만이 정답은 아니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 - 위기의 순간을 사는 철학자들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가 근사하다.  뭔진 모르겠지만 영머가 아닌 단어들도 써있고, 검은 바탕에 적혀 있는 인물들 이름과 '위기의 순간을 사는 철학자들' 이라고 적혀있는것이 우선은 잔뜩 긴장하게 만든다.  근간 읽은 책들과 비교를 하면 1/3도 안될 정도로 얇은 책인데, 이 책에서 오는 중압감이 상당하다.  '이걸 어떻게 읽어내야 하나...?'하는 생각에 매여있다가 짧은 글이니 금방 읽겠지 했는데, 착오였다.  전혀 속도가 나가지 않는다.  우선은 내가 알고 있던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어쩜 이렇게 읽으면서 눈을 거쳐 그냥 허공으로 날라가 버리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 내린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한번에 걸쳐서는 나의 아둔함으로는 이해불가다.  몇번을 읽게 될지는 장담을 할 수 없지만, 나에겐 한번으로 안되는 것만은 확실하다. 

 

 

  '문화평론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영국 워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셰필드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에서 문화이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술, 영화, 대중문화에 대해 글을 쓰며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마녀 프레임』 『무례한 복음』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99% 정치』 등이 있다'라고 책표지에 이택광 교수에 대한 소개글을 봤다.  이택광 교수의 글을 어떤 것도 읽은 것이 없으니, 나처럼 편한글만을 찾는 사람에게는 이런 고귀한 글이 어렵게 느껴진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고귀한 글. 프롤로그부터 기를 죽이더니 '철학자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약도'에서는 나의 무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버린다. 

 

  '정치적인 것'의 계보학을 읽다보면 1932년에 발간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슈미트의 책에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을 시작으로 아렌트의 정치적인 것을 자유의 공간이라고 파악하고, 슈미트와 다른 관점에 있었다는 것까지 쭈욱 이어서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어렵다.  나같은 범인에게는 정말 어렵다.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어 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택광 교수는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철학자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약도'를 풀어주고 있는데 말이다.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왜 프랑스 철학인가?, '정치적인 것'의 계보학, 영국의 신좌파, 이탈리아적인 차이와 철학과 아시아까지 어렵지만 읽어내리긴 했다.  비몽사몽간에도 읽고, 멀쩡한 정신일때도 읽고, 무작정 읽었다.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단어와는 상이한 뜻으로 쓰였음에도 알고 있는 단어가 나오면 반가웠다.

 

'흥미로운 것은 극단적으로 특이한 편협성과 강력한 보편성이 마르크스주의라는 매트릭스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생생한 장면들을 이탈리아의 사상 지형도에서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p.51)

 

  어떤 단어에 반색을 했는지 찾을 수 있겠는가?  '매트릭스'라는 단어 하나에 반가움이 극에 달했다.  전혀 무슨 말인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엉뚱하게 키아누리브스의 '매트릭스'를 떠올리고는 히죽 웃고 있으니 철학을 논하기 전에 내 머리 속을 찬찬히 들여다 봐야만 할 것 같다.  어쨌든, 이택광 교수의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이 제목은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쓴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구절이라는데, 철학은 실패에 대한 사유라는 말이란다. 철학은 또다시 실패할지언정 다시 시도하기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인데, 근사하다.  이태광 교수는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9명의 철학자들에게 하고 있다. 이 질문은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란다.

 

  슬라보예 지젝(사유를 시작하라!), 자크 랑시에르(몫 없는 자들으 몫으로), 지그문트 바우만('2012년 현상'을 기억하라!), 가야트리 스피박(정치적 행위자를 길러내는 교육), 피터 싱어(다윈주의와 윤리적 삶), 사이먼 크리츨리(실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렉 램버트(누가 '영구평화'를 두려워하랴?), 알베르토 토스카노('평범한' 마르크스주의), 제이슨 바커(질니는 훨씬 더 도전적이다) 등 학계에서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주목받는 철학자 아홉 명에게 이메일을 통한 대담이 한 권의 책에 모였다.  각 철학자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질문은 물론 지금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했는지 대단하다.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말이다.  

 

  책 소개글을 읽다보면 2012년 세계적으로 크게 이슈가 됐던 '윌스트리트를 점령하라'같은 대중 운동과 한국의 촛불집회나 아랍의 자스민혁명등 민주주의를 향한 사회변화에 SNS가 어떤 효과를 미쳤는지에 대해 현학들에게 묻고 있다.  짧은 글에는 실려있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현학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통해 위기로 인식되는 지금의 세계 상황에서 철학의 역할과 철학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대담집을 읽으면서 느낀것은 이택광 교수의 지적 사유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웹상으로 이루어진 대담일지라도 그의 질문은 시대를 넘고 철학적 개념들 사이를 종횡무진 헤집고 다닌다.  누구의 이야기든 이야기의 헥심을 파악해 내는 능력 또한 대단하다.  책 뒷표지에 실린 9명의 현학들의 한줄 글을 누가 뽑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렵게 다가 온 대담집보다는 이 짧은 글들이 더 와닿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이글을 어떻게 읽어냈을까? 눈으로 들어가 머리를 거쳐 허공으로 날라갈 지라도 읽어냈으니, 또 한번 도전해보자.  9명의 현학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런이들의 글을 언제 또 읽어 보겠는가?  읽고 또 읽어보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올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