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빨강 - 제11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87
김선희 지음 / 사계절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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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댁에 갈때마다 먹는 음식이 있다. 맵디 매운 '용두동 쭈꾸미'.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 아니 전혀 먹지 못하는 나에게 매운 쭈꾸미요리는 고통이었다.  맛을 느끼기 전에 맵다는 아픔이 먼저 다가오고 함께 자리를 해서 음식을 먹는 가족들을 보는 것 역시 통증으로 다가오곤한다.  모두가 맵디 매운 쭈꾸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족은 모이면 쭈꾸미를 사와 집에서 먹곤한다. 남편의 누나, 시누가 너무나 좋아하는 음식이라 '용두동 쭈꾸미'는 명절이면 빠지지 않는 우리집 음식이다.  언니는 매운음식을 굉장히 좋아한다.  청량고추장도 태양초 고추가루로 만든 고추장에 푹 찍어 먹곤 하는데, 어찌나 매운음식을 좋아하는지 위에 문제가 생겨 매운 음식을 먹지 말라는 의사 소견을 듣고도 매운음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시누를 언니라고 부를만큼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남편보다 언니가 더 좋아진 후에야 언니가 왜 그렇게 매운 음식에 집착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현실이 고달프고 힘이 들수록 언니는 맵고 매운 음식이 땡긴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땀이 나도록 매운 음식은 고통을 안고 오는 것 같지만, 그 순간 만큼은 어떤 잡다한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래서 언니 생각이 난다. 열여덟 대한민국 청소년 '길동'을 만나면서, 생각 난 인물은 언니였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길동을 만나보자.  한국인이라면 '길동'의 이름을 듣는 순간 허균의 '홍길동'이 생각나는게 자연스럽지만, 길동의 성은 '길'이고 그냥 이름이 '동'이다. 외자 이름이라니 근사하다고 해야하는데, 이 친구의 삶이 참 쓰게 다가온다.    

 

 

 

  2년 전, 길동의 아버지는 이삿짐을 옮기다 사고를 당했다. 한 달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아버지가 깨어 났지만,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한순간 일곱 살 막내가 되어, 자신의 아내를 ‘엄마’, 큰아들 명이를 ‘큰형’, 둘째아들 동이를 ‘작은형’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버지는 심심하다 싶으면 지붕 위에 올라가 말을 타기 시작한다. 가정경제를 위해서 엄마와 형이 치킨집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쉰아홉의 일곱 살 막내를 돌보는 건 길동의 몫이 되어버렸다. 열여덟의 육아 스트레스라니.  이 스트레스와 열여덟 나이의 주체할 수 없는 왕성한 호르몬을 해결하기 위해서 길동은 밤마다 '야동'을 본다.  중학교 남학생들도 자연스럽게 보는것을 열여덟 호기심 왕성한 청소년에게 막을 수는 없으니 당연하게 넘어가자.  이렇게 육아 스트레스로 정신 없는 길동에게 '오미령'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다.

 

  청양고추를 껌씹 듯 잘근잘근 씹어 낼 만큼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아이. 매운 건 딱 질색이지만 미령을 만나기 위한 방법으로 길동은 미령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더 빨강-고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식도락 모임’에 가입한다.  모임 멤버들의 매운맛 사랑은 보통 사람, 길동에게는 근접하기 힘들지만, 사랑의 힘은 얼마나 대단한지, 매운걸 못먹는 길동을 변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이 모임의 진짜 모습은 매운것을 좋아하는 모임이 아니란다.  길동은 어떻게 해야할까?  일곱 살이 되어 버린 아버지를 돌보는 것도 힘이든데, 자살모임의 수장인 여자친구까지 신경써야 하다니 정신이 없다.  이럴 땐 멀찌감치 한발 뒤로 빼야 할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또 인생이 아닌가?  그뿐이 아니다. 불행은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이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서 툭 튀어나오고 저기서 튀어나오고 열 여덟 아이를 샌드백도 아닌데 너무 쳐된다. 이 아이가 의지할 곳 조차도 없게 말이다.  

 

식구들 생각이 났다. 일곱 살이 되어 버린 아버지, 떠나 버린 형, 지난한 삶의 현장 속으로 다시 뛰어든 엄마.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지만, 그전보다는 다른 형태의 결속으로 맺어질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별로 행복해 본 적이 없는 가족이고, 함께 나눈 즐거움이나 행복보다는 함께 나눈 고통이 더 많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단단해진 가족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하는 확신. (p.187)

 

  형에게는 폭력적이었고, 엄마에게는 신경질적인 잔소리꾼이었고, 길동에게는 무관심했다가 아이가 되어버린 아버지.  죽음과 친해지고 싶어하는 여자 친구. 짧은 호흡이기에 편하게 읽을 수 있는『더 빨강』은 청소년 소설답게 통통 튄다.  매운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카페 주인장을 꼬셔볼 목적으로 카페에 가입한 소년과 그 주변인물들의 이야기. 폭력적이었던 아버지가 아이가 되어 가족을 의지하는 이야기.  심사위원들의 말처럼 십대 소년의 자연스러운 본능인 ‘성욕’과 어린아이로 돌아간 아버지의 ‘동심’, 그리고 매운맛에 집착하는 소녀의 이야기가 ‘빨강’이라는 이미지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더 빨강』은 매운 음식이 당기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목마'를 통한 가족의 이야기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다. 여러가지 양념들이 적절하게 들어가 맛있게 맵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고 있는 주부들에게 김선희 작가의 『더 빨강』은 자꾸만 손이 가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책이다. 참, 맛있게 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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