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조커 1 한네 빌헬름센 형사 시리즈
안네 홀트 지음, 배인섭 옮김 / 펄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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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야기의 시작은 차가운 봄바람이 불어오는 오슬로 피오르에서 한 남자가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다음 장면, 고등검사 할보르스루드의 집에선 그의 아내가 사무라이 검에 목이 잘린 상태로 발견되어 진다.  주검 곁에는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 할보르스루드가 앉아 있다.  안네 홀트의 <데드조커>는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알고 있던 그런 인물이 아닌, 전혀 새로운 수사반장, 한네 빌헬름센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인간적이다 못해 너무나 현실적인 모습에 수사반장이 있다.  날카로운 직감과 사건을 휘두르는 면은 있지만, 바쁜 삶에 씻지도 자지도 먹지도 못해 폐인처럼 다가오고 있다.  그럼에도 뭇 남성들은 그녀에 매력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버럭버럭 소리 지르고, 재털이를 던져도 씩~ 웃으면서 받아쳐준다. 첫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연인은 죽음을 바라보고 있지만  평범한지 못한 사랑처럼 보인다. 동성애. 20년이 넘은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그려지고,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 처럼 보인다.  변호사인 친구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이야기 하다가고, 친구의 남편이 보여주는 호의에 가슴 뭉클하기도 한다. 노르웨이인들의 애정관이 이런가?  잘 모르겠다.

 

 

 <밀레니엄>을 필두로 북유럽 소설들이 쏟아지고 있다. 쏟아지는 이야기들은 내 정서와는 맞지 않은 점도 있지만, 새로움으로 다가오고 신선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이야기들이 들려주는 북유럽의 정서들이 시종 동일하게 흐르는 것을 보면 동성간의 사랑이나 그곳에 애정간이 우리와는 다른 듯 하다.  그럴지라도 책을 읽는데 무리는 없다.  이런 삶들도 있구나 하고 그냥 넘어간다. 그런 정서가 이야기의 흐름을 막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사건 현장은 고등검사 할보르스루드를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어진 지문과 자기 아내가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동안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두 시간 동안이나 신고조차 하지 않는 남편. 그리고 그가 범인으로 지목한 스톨레 살베센은 며칠 전 다리에서 뛰어내렸단다. 모두가 할버르스루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네의 촉은 다른곳으로 움직인다. 뭔가가 있다. 너무나 깨끗하고 그를 지목하는 것이 이상하다. 사건 뒤에 분명 뭔가가 있다.  

 

 <데드 조커>라는 제목을 만나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조커는 베트맨에 나오는 입 찢어진 아저씨니까.  카드게임을 알지 못해서 조커가 카드게임에 나오는 단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 제목이 생소했던것이 사실이다.  죽은 조커.  조커라는 것을 찾아보니 카드게임에서는 승패를 좌우할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죽은 조커라니, 뭘까? 처음엔 그랬다.  1권의 마지막으로 달려갈수록 왜 작가가 제목을 '데드 조커'라고 지었는지는 이해가 되지만, 여전히 사무라이 칼위에서 날고 있는 파란 나비는 이해를 못하겠다.  다시 산다는 의미일까?  사무라이 칼로 죽임을 당한 도리스.  나비효과의 나비가 파란색이었던 걸로 기억되니, 그런 의미일까?  끝까지 나비를 쫓아가 보자.  죽은 조커를 쫓아가다 보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디에도 있지 않지만, 한네가 가는 곳마다 있는 몰락한 CEO 스톨레 살베센의 짙은 그림자.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어린시절 양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신의 손으로 귀를 잘라 버린 천사같은 청년 에이빈 트르스비크, 소아성애에 빠져있으면서 매일 달리는 사회부 기자 에발 브르모, 누군지 알수 없지만 성아성애자들에 뒤를 봐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카이.  이야기의 흐름이 늦추어 지는 것처럼 보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스토레 살베센과 천사같다는 이야기를 후광처럼 달고 다니는 에이빈 트르스비크가 의심스러웠다.  분명 이들에게 뭔가가 있는데...  모든 지각을 가지고 있는 한네가 움직이지만 사건에 빠져서 사건만 보고 있지는 않는다.  그녀의 사랑이 죽어가고 있으니까.  사건도 사건이지만, 한네의 모습이 엉망이 되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세실리였다.  신경써주지 못한 사이에 세실리가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누구를 먼저 찾는 것이 답을 찾는 길일까?  한네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에 이야기와 함께 1권에서는  할보르스루드가 구류에서 풀려난다. 파파걸 테아에 건강으로 인해서. 중간중간 나오는 소아성애 이야기로 인해서 테아와  할보르스루드의 관계가 의심스러워지고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한다면 노르웨이의 애거서 크리스티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요 네스뵈의 말에 의심을 해야할 것이다.  전직 기자, 아나운서, 경찰관, 변호사를 거쳐 법무부 장관까지 지낸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인 안네 홀트가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지는 2권을 통해서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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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추구 2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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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히 하베 니히츠 다폰 게부쓰트. '나는 몰랐다' (p.204)

 

 나만 행복하면 괜찮은걸까?  그렇다면 새러는 분명 행복이라 이야기 할수 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오빠를 미소 띠면서 바라 보는 것도, 자신의 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 것도.  그가 유부남일지라도 그의 아내가 눈 감아준다고 하니, 결혼이라는 의무가 없는 사랑만 하면 되고,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있으니 행복했다.  가끔, 잭의 아내 도로시에게 미안한 감정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는가 라고 생각을 했다. 잭은 도로시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잭의 사랑은 오직 새러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맘이 편하려면 말이다.  일주일에 두번씩 출장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찾는 잭. 점점 더 그가 그녀에게 들어오고 있다.  사상이 맞지 않는 오빠로 인해서 불화가 있을 것도 같았지만, 새러는 자신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다. 

 

 

 이 평화가 계속 될 수 있다 생각했는데, 평화의 부식이 오빠에게서 부터 일어날 지는 몰랐다.  대학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했던 에릭. 한때 공산당원에 가입했었던 그 오래전 일이 에릭을 공산당 부역자로 몰아가면서 에릭에 모든것이 허물어 지기 시작한다.  새러는 충분히 에릭을 도울 수 있다 생각했지만 자존심 강한 에릭은 동생의 도움을 거부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래도 오빠가 자랑스러웠다.  '슬리피, 그럼피, 도피, 배시플, 해피, 스니지, 닥터 그리고 SW'(p.109) 오빠가 알고 있다는 유일한 공산당원들의 이름.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이 자랑스러운 오빠가 터무니 없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빠의 모든것이 물거품 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전업 방랑자가 되려고 했어. 난 하루 종일 거닐기로 했어. 극장에서 극장으로의 방랑이랄까?  걷고 또 걷고 계속 걷는 거야.'(p.138).  오빠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들이 가슴을 저민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오빠가 다시 재개하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오빠의 죽음으로 그녀에게 남은 사람은 잭 뿐이었다.  오빠를 위해 애써주던 사람.  오빠를 위해 함께 슬퍼해주고 애통해하던 사람.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오빠에 보험금이 새러에게 남겨졌단다.  어마어마한 돈이.  돈만 남겨졌다면, 조엘 에버츠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이 바꼈을까?  조엘 에버츠가 이야기하는 밀고자.  이제는 당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오래전에 탈퇴한 인물이지만,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 그 사람이 오빠였단다.  그래서 오빠를 이야기 했단다.  그녀의 사랑이. "밀고자는 잭 말론이었어요."(p.188).  책을 읽으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야기되어 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이야기가 만들어 지려면 잭이 어딘가에서 나와야 하니까.  스포가 되어 버렸나?  분명 1권은 새러와 잭의 사랑이야기라고만 생각을 했었으니까.  전후 미국 사회에 이념논쟁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죽지 않기위해서 누군가에 이름을 말해야만 했던, 마녀사냥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나보다. 그렇게 새러는 잭을 떠난다. "이히 하베 니히츠 다폰 게부쓰트. '나는 몰랐다'" (p.204)는 잭이 사용해서는 안되는 말이었으니까. 그렇게 잭은 새러에게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제 통속적인 이야기를 끌어낼 준비는 다 된것처럼 보인다.  임신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새러는 임신을 할테고, 옛사랑이었던 이들은 아이로 인해서 화해를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만들어 버리면 더글라스 케네디가 아니다.  그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 이 남자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인간의 심리를 이야기한다.  여자이든 남자이든, 성별은 중요치가 않다.  그가 이야기를 만들면 통속적일 수 밖에 없는 모든것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말처럼 <행복의 추구>는  케네디의 다른 작품들의 비해서 방대한 분량으로 1940년대부터 스마이스가와 말론가의 이야기를,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살아서 움직이는 인물들, 새러, 에릭, 잭, 도로시, 케이트와 찰리까지. 통속적으로 끝나버릴 것 같은 인물들은 다른 이야기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새러의 만남, 사랑, 이별, 재회, 화해, 용서로 움직이는 삶의 수레바퀴를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나만 행복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풀어버렸다면 먹먹했을 것이다.  이 방대한 책을 덮은 후, '이게 더글라스 케네디지'라고 씽끗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나의 행복만큼 내가 아닌 타인의 행복까지 바라보려 노력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숨결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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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추구 1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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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대로 보이는 노부인이 엄마의 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잿빛 머리에 키가 크고 몸집이 호리호리한 노부인이었다.  내가 그 연배쯤 되었을 때 되길 바라는 모습.  굽지 않고 꼿꼿한 등, 균형 잡힌 골격, 하얀 피부... p.7

 

 이야기의 시작은 칠십 대로 보이는 노부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노부인? 스무살엔 칠십이라는 나이가 나와는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내 엄마의 나이가 칠십가까이 되고 나서야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란것을 알아버렸지만 말이다.  여전히 사랑을 아는 그런 나이.. 아니, 어쩌면 여자는 평생을 사랑받고 살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는다면 평생 누군가와 사랑을 하던지.  책방사이트에 <행복의 추구>가 몇 주째 걸려있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글이니 이 글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읽은 그의 책중 두권으로 된 유일한 책이다.  꽤나 읽어야 할 양이 많은 장편의 글임에는 확실한데, 1권을 읽고 2권을 내리 읽었다.  중간에 멈출수가 없었다.   <위험한 관계>를 읽었을 때, 첫 1/3이 어찌나 지루하던지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 부분을 넘어서면서 느꼈던 롤러코스터를 이 글에선 느낄수가 없었다.  그냥 잔잔함.  그런데 멈출수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랑때문에 웃고 사랑으로 울고, 또 사랑에 답답함.  어떤것이 행복의 추구일까?  작가는, 왜 그녀들에게 <행복의 추구>를 이야기 하려 했을까? 그녀들이 추구했던 행복. 행복하긴 한걸까?

 

 

 

 주부들이 모이는 사이트에서 가장 욕을 얻어 먹는 사람은 단연코 새러와 잭같은 인물이다.  자신들의 사랑으로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들.  자신들은 사랑이라 이야기 하지만, 통상적으로 그 사랑은 불륜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은 고귀한 사랑이라 외쳐되지만 완벽한 불륜의 대상이다.  내 주변에 이들이 있었다면 등 돌리고 외면해 버렸을텐데, 그들의 사랑, 아니 그녀의 삶에 연민을 느끼고 있다.  어느새, 나에게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친구가 되어 버려 그녀를 옹호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장래식장에서 노부인을 본 것은 케이트였다. 잭 말론과 도로시의 딸. 오빠 찰리가 있지만 연락이 안된지는 오래되었고, 메그 고모의 표현으로는 '우라질 놈'이라는 전 남편 사이에서 난 사랑스러운 에단을 키우고 있는 케이트.  엄마가 돌아가시고 노부인이 계속 그녀 주위를 멤돌기 시작한다.  케이트에게 보내진 우편물. 그속에 들어있는 아빠와 노부인의 젊은 시절 사진.  케이트와 찰리. 그리고 에단의 사진까지.  스토킹이라고 생각이 들어도, 궁금했다.  무슨 이유로, 노부인이 케이트의 주변을 멤도는지. 어째서 노부인이 그녀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잭 말론, 즉 케이트의 아버지는 내가 평생 사랑한 남자였어요. "p.95

 

 처음 본 노부인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대책없이 죽어버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엄마의 표현으로 아빠는 남성다운 멋진 사람이었다.  케이트가 몰랐던 아빠의 연인.  그 사람이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이제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 나타나 사랑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케이트로 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새러로 넘어간다.  새러 스마이스.  새러와 스마이스에 s가 들어가 오빠 에릭 스마이스가 에스라고 부르는 스마이스는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의 보수적인 부모밑에서 자란 아가씨다. 한때 공산주의에 빠졌었던 오빠가 있지만, 이제는 탈퇴해서 뉴육에서 생활을 하고있다. 결혼을 이야기하는 부모의 뜻을 버리고 대학 졸업과 함께 뉴육의 잡지사<라이프>에서 사회의 첫발을 내딛는 새러. 그리고 부모의 죽음.  이제 그녀에게 남은 사람은 오빠 에릭 스마이스 밖에는 없다.   희곡작가의 꿈을 꾸고 있는 에릭.  에릭의 주변은 언제나 정신이 없을만큼 북적되었고, 그곳에서 새러는 잭 말론을 만난다.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 없으리라고 새러는 생각을 했었다.  잭을 만나기 전까진...

 

 첫눈에 빠진 사랑. 하룻밤에 인연.  그가 반드시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무수한 편지에 대한 답은 '미안해요'라는 단 한줄의 엽서 뿐이었다.  이런 무책임한 사람이 있을까?  하룻밤에 인연은 새러를 바꿔놓는다.  그와의 만남을 글로 쓰기 시작하고, 그것으로 인해 일을하기 시작하는 새러.  사랑이 다시 찾아올수 있을까?  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결혼으로 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안주는 그녀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시월드'라는 표현이 있다.  '시월드'가 미국이란 나라, 1940년대의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얼마나 강하게 불었던지, 읽는 내내 눈살을 찌뿌리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게 만든다.  새러에게 남은건 오직 오빠 에릭뿐인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새러의 유산.  '시월드'의 탈출과 함께 새러는 안정을 찾는 것 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자유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까지 해결이 되었으니까.   <새터데이 나이트/선데이 모닝>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는 새러와 잘나가는 <마티 매닝 쇼>의 코미디 작가로 승승장구를 하고 있는 에릭.  가끔 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윈첼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는다.

 

 '내가 바라는 건 완전한 독립이었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아도 될 말큼 홀로 서는 것. 내 행복과 운명을 남자에게 맡기는 상황은 더 이상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p.335)   스마이스 남매의 승승장구로 이야기가 끝이났다면 행복했을까?  완전한 독립을 이야기 하지만 28살의 이혼녀라는 사실도 함께 강조하는 새러.  "믿을 수 있겠니?" "믿을 수 없어. 사실은 우리에게 찾아온 행운도 믿기지 않아."(p.361).  이렇게 두 남매는 행복한것 처럼 보였다.  희곡작가는 아니더라도 코미디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에릭과 수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새러.  경제적인 것이 성공의 척도라면 당연히 그렇게 보였다.  잭 말론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새러에게 잭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다.  부인과 아이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는 그 모습 그대로.  어쩜 이렇게 파렴치 할수 있을까?  사랑은 오직 새러뿐이라고 어떻게 이야기 할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새러.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1권은 마무리 된다.  1940년대의 미국 사회를 나는 모른다.  책을 통해서 만나고 있지만, 그 사회가 이랬는지 확신도 없다.  우리 사회와 비슷하구나 하는 정도.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2012년의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날법한 이야기들이 1940년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시대를 앞서가고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더글라스 케네디가 들려주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새러의 인생.  아니, 현대판 여자의 일생?  아니면 삶은 알수 없는 것? 

 

생을 결정하는 아주 중대한 기로에 섰을 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기란 그리 쉽지 않아요. 흔히 본능에 기대거나 즉흥적으로, 혹은 두려움에 굴복해 결정을 내리게 되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생이 원치 않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죠.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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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서 굴욕을 당했을까? - 하인리히 4세 vs 그레고리우스 7세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19
이영재.이명재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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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교황,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카노사에서 맨발로 삼일을 꿇어앉고 용서를 빈 사건이다.  우리 말로 하면 '석고대죄'쯤 될 듯 하다.  눈내리는 벌판에서 가족들과 함께 맨발로 삼일을 용서를 빌었다.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물론 상식선으로는 알고 있다. 교회 개혁을 외쳤던 그레고리우스 7세와 황제의 권위를 이야기했던 하인리히 4세의 이야기 만이 아니라, 이들로 부터 시작된 중세 유럽의 가장 큰 사건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굴찍한 사건은 한발 뒤에서 들여다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사건이다.  자신의 말을 안들었다는 이유로 '넌 아냐. 이제부터 기독교인이 아냐'를 외쳐버리는 교황이 있으니 말이다. 

 

 

 중세는, 그것도 유럽은 그렇게도 그리스도를 탄압했을때는 언제고 이젠 언제 그랬냐는듯이 교황의 말 한마디로 파면을 시켜버리니 아이러니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뿐은 아니겠지만, 우스운것은 사실이다.  젊은 황제의 석고대죄는 교황의 승리인것 처럼 보였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을까? 이일로 인해서, 그레고리우스 7세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갈수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우르바누스 2세는 그레고리우스7세보다는 지략이 뛰어났었던 것 같다.  황제를 눈 속에 세워둠으로써 로마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을 이슬람과의 전쟁에 내보냄으로써 로마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카노사의 굴욕'은 '십자군 전쟁'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카노사의 굴욕'만 보려고 한다.  이책이 다루는 부분이 딱 거기 까지니까.

 

 

 역사공화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는 역시 김딴지 변호사와 이대로 변호사다.  이번엔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에 세웠다.  직권남용과 명예훼손이란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로부터 생전에 받았던 굴욕을 깨끗이 씻고 황제로서의 명예를 회복 할수 있을까?  회복한다고 별반 달라질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워낙에 '카노사의 굴욕'이 유명해서 그렇지, 자신의 아들에게 수모를 당한것에 대한 소송부터 거는것이 맞을텐데, 그 사건은 약하니 세계사 법정에서 다룰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억울했을 법 하기는 하다. 초기의 황제는 교황보다 종교적인 힘이 컸었으니 말이다.  세속 군주인 황제와 영적 군주라 할 수 있는 교황의 대립.

 

 그들의 처음은 어땠을까?  하인리히 4세는 여섯살이라는 어린나이로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여섯살의 황제는 대부였던 힐데브란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힐데브란트가 누구일까?  힐데브란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세속명이다.  어린 황제는 어머니의 섭정과 교회의 성직자들을 보면서 힘의 논리를 익히게 된다.  이때부터 이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주교를 황제가 뽑아야 한다는 하인리히를 보면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5년에 '교회 법령'27개조항을 보내게 된다. 교황이 그리스도교 사회에서는 가장 강력한 권위자라는 내용으로 교황이 황제를 폐위할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교회 법령'27개 조항으로 굴욕을 느낀 황제는 1076년 1월 24일 보름스에서 교황을 폐위시키려 하지만 2월 22일 교황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파문령까지 내리면서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파문은 막아야 하니말이다.

 

 

 '카노사의 굴욕'을 보다보면 '제 6차 십자군 원정'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와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이름이 같아서 일까?  열심히 그레고리우스는 프리드리히에게 파문 명령을 내리지만, 프리드리히는 너는 내려라, 나는 내 갈길을 갈련다 하면서 유유자작 한것을 보면 시대마다 이 파문의 힘도 다른 것 같다.  역시나 그레고리우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교황은 독일황제에게도 두번씩이나 파문을 내렸으니 말이다.  '카노사의 굴욕'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뒷에서 또한번 뒤통수를 치고 싶어하는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7세 덕분에 또 한번 폐위와 파문이 일어난다.  교황이 황제에 대한 2차 파문 후 싸움에서 교황쪽 군인인 노르만 군인들이 로마를 강탈하고 파괴하여 시민의 분노가 매우 커짐으로 인해, 전쟁에 승리했음에도 로마를 떠나 죽을때까지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표면상으로는 교황의 승리처럼 보였다.

 

 '카노사의 굴욕'사건은 교황과 황제 모두에게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는 사건이었다.  황제는 수치스럽지만 황제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교황은 속죄하는 양을 감싸 안은 관용을 베푼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면으로는 모르겠다.  그레고리스우는 7세는 전쟁후 살레르노로 망명하여 죽음에 이르니, 어찌보면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 개혁은 실패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개혁 운동은 다음 교황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실천되어 이후 서구 사회를 이끄는 주요한 교회 이념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신이 전쟁을 바란다'는 교황의 한마디로 200년동안의 '십자군 전쟁'을 이어간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역사 속 사건들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것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것은 없다.  어떻게 엮이는 지는 시대가 바뀐후에야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씨실과 날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엮이면서 커다란 역사의 장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래서 역사는 재밌다.  어디로 튈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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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니발 장군은 알프스를 넘었을까? - 한니발 vs 스키피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12
박재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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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역사공화국 세계사 법정을 만났다.  한동안 한국사와 세계사에 빠져있었는데, 소설을 손에 잡으면 또 동떨어지고 만다.  <십자군 이야기>와 <사화 시리즈>를 통해서 만났던 한국사와 유럽사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고, 몇주만에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가장 왕성하게 제 할일을 하고 있었다.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내 머릿속 세계사가 통째로 날라가 버렸다.   그래도 간혹 남아 있는 몇 가지 중 하나가 한니발 장군이다.  때앙볕 작렬하는 아프리카쪽에서 살던 사람이 눈보라를 헤치고 코끼리 군단과 함께 알프스산맥을 넘는 모습.  베네딕트 마송의 그림으로도 유명한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는 한니발 장군>은 얼마나 장엄한가?  그래서 세계사 중 한니발 장군의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궁금하니까.

 

 

“장군, 장군 생각에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누구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능가할 사람은 없소.” “그렇군요. 그러면 두 번째는요?” “에피루스의 피로스요.” “…음. 그럼 세 번째는?” “바로 나, 카르타고의 한니발이오.” “하하, 장군은 자마 전투에서 나에게 패하지 않았소? 어찌 패장이 승장 아페어서 자신을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한단 말이오? 지나가던 개도 웃겠소그려. 하하." "만약 내가 자마 전투에서 당신에게 승리했다면, 나는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능가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으로 불렸을 거요." (p.14)

 

 이렇게 '한니발 vs 스키피오'의 대결이 시작된다.  원고측 변호사는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혼신의 힘을 쏟는 김딴지 변호사,  피고측은 기존의 역사적 평가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역사적 진실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대로 변호사가 맡았다.  어찌나 두분다 똑똑하신지, 함께 하다보면 세계사속에서 재미있는 게임을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물론, 한니발 장군의 이야기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페니키아인의'라는 뜻으로,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어서 로마인들이 포에니라고 불렀던 '포에니 전쟁'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우선일 듯 하다. 

 

 카르타고와 로마 간에 벌어진 포에니 전쟁은 3차에 걸쳐 약 120년 동안 계속 되었다.  기원전 814년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되어지는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해상 무역 문화를 꽃피우던 곳이었다.   당시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패권을 잡고 있었고,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라타고의 허락 없이는 바다에서 손도 씻을 수 없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 였다.  하지만 로마가 카르타고의 지배 아래 있던 시칠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벌인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코르부스를 이용해서 카르타고와의 전투에서 승전을 한다.  코르부스는 라틴어로 까마귀라는 뜻인데, 배와 배를 연결하는 일종의 다리로 끝에 날카로운 철제 갈고리가 달려 있어서 갑판을 뚫고 들어가 깊이 박히는 역활을 한다.  해상전에 불리한 로마가 해상전을 코르부스를 이용해서 육상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제 한니발이 나오기 시작한다.  1차포에니 전쟁의 중심에 있던 카르타고의 하밀카르의 아들이 한니발이다.  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 불릴 말큼 한니발의 활약이 대단했다.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29세의 나이로 10만여명의 대군과 코끼리 37마리를 이끌로 카르타헤나에서 로마로 출정하게 된다.  해군이 강한 카르타고의 장군이 로마가 전혀 예상 하지 못할 방향, 이탈리아 반도 북쪽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을 택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은것이다.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10만의 대군은 6만으로 줄어들지만, 한니발의 위력은 대단했다.  전승을 거두면서 로마를 압박해오는 한니발.  하지만, 본국에서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한니발의 힘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로마연합을 와해시키려는 시도는 불발이 되면서 로마의 청년 장교 스키피오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만다.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는 한니발 장군> by 베네딕트 마송

 

 

 제 3차 포에니 전쟁은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할 정도로 로마의 승리였다.  기원전 146년 전쟁의 3년째가 되는 해, 로마군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함락된 카르타고는 노예가 된 사람들이 어린 아이까지 포함헤사 5만명에 이르렀고, 성벽, 신전, 가옥들과 자장 건물들을 모두 파괴하고 불질렀으며, 땅을 가래로 갈아엎고 소금을 뿌려,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폐허로 만들면서 로마 역사상 그 당시까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만행을 저질렀다.  7백전동안 드넓은 지중해 세계를 호령했던 카르타고의 영광은 불타는 폐허 속으로 이렇게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의 승리가 로마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강한 적은 내부의 적이라고 했던가?  로마의 근본적인 위기는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이탈리아 반도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토지는 황폐화되고 전염병까지 돌면서 민중은 약해지고, 전쟁의 승리로 귀족들은 부유해졌다. 이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크라쿠스였는데, 이들의 토지 제도 개혁은 실폐로 돌아가고, 귀족들에게 살해를 당한다. 이렇게 공화정은 무너지고, 황제가 군림을 하게 되는데, 포에니 전쟁의 뒤를 잇는 이야기가 '부르투스 너마저..'로 유명한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 이야기다.  카이사르 이야기는 전에 쓴적이 있다.  카이사르 보다 한니발 이야기를 먼저 읽었더라면 훨씬 재밌었을 테지만, 지난 시간을 돌릴수는 없고, 이제야 하나씩 짝이 맞춰가니 그 또한 감사하다.   역사에 '만약'을 가져다 붙인다면 그건 더 이상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 된다.  하지만, 생각은 해볼수 있지 않을까?  역사 사실과 역사 기록은 별개의 문제이니 말이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기록자의 주관이 필연적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고, 그러기에 승자의 기록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승자의 기록의 헛점을.  '만약'이 소설이 될지라도,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는 다른 형태로 언제나 되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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