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서 굴욕을 당했을까? - 하인리히 4세 vs 그레고리우스 7세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19
이영재.이명재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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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교황,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카노사에서 맨발로 삼일을 꿇어앉고 용서를 빈 사건이다.  우리 말로 하면 '석고대죄'쯤 될 듯 하다.  눈내리는 벌판에서 가족들과 함께 맨발로 삼일을 용서를 빌었다.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물론 상식선으로는 알고 있다. 교회 개혁을 외쳤던 그레고리우스 7세와 황제의 권위를 이야기했던 하인리히 4세의 이야기 만이 아니라, 이들로 부터 시작된 중세 유럽의 가장 큰 사건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굴찍한 사건은 한발 뒤에서 들여다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사건이다.  자신의 말을 안들었다는 이유로 '넌 아냐. 이제부터 기독교인이 아냐'를 외쳐버리는 교황이 있으니 말이다. 

 

 

 중세는, 그것도 유럽은 그렇게도 그리스도를 탄압했을때는 언제고 이젠 언제 그랬냐는듯이 교황의 말 한마디로 파면을 시켜버리니 아이러니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뿐은 아니겠지만, 우스운것은 사실이다.  젊은 황제의 석고대죄는 교황의 승리인것 처럼 보였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을까? 이일로 인해서, 그레고리우스 7세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갈수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우르바누스 2세는 그레고리우스7세보다는 지략이 뛰어났었던 것 같다.  황제를 눈 속에 세워둠으로써 로마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을 이슬람과의 전쟁에 내보냄으로써 로마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카노사의 굴욕'은 '십자군 전쟁'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카노사의 굴욕'만 보려고 한다.  이책이 다루는 부분이 딱 거기 까지니까.

 

 

 역사공화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는 역시 김딴지 변호사와 이대로 변호사다.  이번엔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에 세웠다.  직권남용과 명예훼손이란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로부터 생전에 받았던 굴욕을 깨끗이 씻고 황제로서의 명예를 회복 할수 있을까?  회복한다고 별반 달라질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워낙에 '카노사의 굴욕'이 유명해서 그렇지, 자신의 아들에게 수모를 당한것에 대한 소송부터 거는것이 맞을텐데, 그 사건은 약하니 세계사 법정에서 다룰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억울했을 법 하기는 하다. 초기의 황제는 교황보다 종교적인 힘이 컸었으니 말이다.  세속 군주인 황제와 영적 군주라 할 수 있는 교황의 대립.

 

 그들의 처음은 어땠을까?  하인리히 4세는 여섯살이라는 어린나이로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여섯살의 황제는 대부였던 힐데브란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힐데브란트가 누구일까?  힐데브란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세속명이다.  어린 황제는 어머니의 섭정과 교회의 성직자들을 보면서 힘의 논리를 익히게 된다.  이때부터 이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주교를 황제가 뽑아야 한다는 하인리히를 보면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5년에 '교회 법령'27개조항을 보내게 된다. 교황이 그리스도교 사회에서는 가장 강력한 권위자라는 내용으로 교황이 황제를 폐위할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교회 법령'27개 조항으로 굴욕을 느낀 황제는 1076년 1월 24일 보름스에서 교황을 폐위시키려 하지만 2월 22일 교황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파문령까지 내리면서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파문은 막아야 하니말이다.

 

 

 '카노사의 굴욕'을 보다보면 '제 6차 십자군 원정'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와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이름이 같아서 일까?  열심히 그레고리우스는 프리드리히에게 파문 명령을 내리지만, 프리드리히는 너는 내려라, 나는 내 갈길을 갈련다 하면서 유유자작 한것을 보면 시대마다 이 파문의 힘도 다른 것 같다.  역시나 그레고리우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교황은 독일황제에게도 두번씩이나 파문을 내렸으니 말이다.  '카노사의 굴욕'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뒷에서 또한번 뒤통수를 치고 싶어하는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7세 덕분에 또 한번 폐위와 파문이 일어난다.  교황이 황제에 대한 2차 파문 후 싸움에서 교황쪽 군인인 노르만 군인들이 로마를 강탈하고 파괴하여 시민의 분노가 매우 커짐으로 인해, 전쟁에 승리했음에도 로마를 떠나 죽을때까지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표면상으로는 교황의 승리처럼 보였다.

 

 '카노사의 굴욕'사건은 교황과 황제 모두에게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는 사건이었다.  황제는 수치스럽지만 황제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교황은 속죄하는 양을 감싸 안은 관용을 베푼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면으로는 모르겠다.  그레고리스우는 7세는 전쟁후 살레르노로 망명하여 죽음에 이르니, 어찌보면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 개혁은 실패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개혁 운동은 다음 교황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실천되어 이후 서구 사회를 이끄는 주요한 교회 이념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신이 전쟁을 바란다'는 교황의 한마디로 200년동안의 '십자군 전쟁'을 이어간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역사 속 사건들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것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것은 없다.  어떻게 엮이는 지는 시대가 바뀐후에야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씨실과 날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엮이면서 커다란 역사의 장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래서 역사는 재밌다.  어디로 튈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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