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여자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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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이니까 만들 수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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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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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은 화려했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였다.
    어디선가 본듯한 내용들이 많이 배치돼서 이해하기 편했다. 공감도 갔다. 어쩌면 미국이 저지른 본토 인디언이나 흑인들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도 같고, 환경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제작된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흥행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이해가 좀 힘든 3D라는 영상기술을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만든 것은 아니다. 정말 화려하게 만들었다. 아름답기도 하고, 공중장면에선 내가 마치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생각조차 들었다. 정말 대단한 장면이다.
    그런데, 좀 아쉽다. 그렇게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겠지만 일본만화영화인 ‘바람의 계곡 나오시카’나 ‘원령공주’의 어떤 것들이 계속 연상이 됐다. 하긴 영화 치고 어떤 부분을 copy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어떤 이는 ‘Mission’이란 영화의 어느 부분이 생각난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구성은 너무 흔한 것들을 차용한 것만 같다. ‘제임스 카메론’ 정도의 감독이라면 그런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말은 하지 못하리라. 이 점에서 창조성은 너무 떨어진다. 설사 copy 안 한 작품이 어디 있겠냐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를 새로운 Version으로 보이도록 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베끼는 것이 아닌 좀 더 upgrade된 그 무엇이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담고 있는 주제의식과 철학 역시 비판 받을 수밖에 없다. 자연으로 좀 더 가까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왜 지구인이 나비족의 새로운 대안이어야 하냐는 점이다. 영화는 결국 이해 못할 선택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우주를 넘나드는 첨단무기를 자랑하는 지구인이 거의 원주민 수준의 나비족과의 대결에서 멋지게 실패한다. 과거 본토 인디언이 그랬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을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다. 이건 과도한 환상이고 자기만족일 뿐이다. 마치 지금의 아마존 지역주민이 정부 주도의 개발을 막은 사례와 같다고 할까? 그런데 과연 이것이 성공하고 있을까?
    사실, 지구인들이 과연 나비족과 좋은 유대관계를 애초부터 생각했었을까 하는 의심조차 든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영화의 주제나 목적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했기에 만든 장치 정도로만 생각하면 될 것도 같다. 인간이 그나마 희망이 있는 편이 낫다는 점은 부인 못하겠다. 역시 동화로만 끝나고 있다. 차라리 나비족이 인간이었던 주인공의 뛰어난 기술을 받아들여서 강해졌다면 그나마 낫지 않았을까?
    결국 영화에서 남는 것은 뛰어난 영상이다. 앞으로 어떤 영화가 나오더라도 ‘아바타’는 그 시작을 알리는 영화로서 평가될 것이고, 많은 이들이 이 부분을 지적하고 주장한다. 나 역시 그 부분에 동의한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가 왜 성공을 거두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미국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하고 앞으로 미국이 열망하는 사회가 결국 기술발전에 의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회이다.
    이것은 심한 모순이다. 현대문명의 발전이 자연환경 파괴와 함께 가는 상황에서 문명의 발전으로 자연환경보호운동을 하자는 것이다. 의도는 좋다. 홍보용으로 좋은 영상과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이다. 다만 상업성을 위해 주제를 단순히 최근 애용되고 있는 주제를 차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든다. 또한 현대문명을 이끄는 것은 서민도, 대중도, 심지어는 환경단체도 아닌 자본가들이며, 그들의 탐욕이야말로 현대문명을 발전시키고 있는 주체이다.
    무기의 발전이 타인의 자본을 뺏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 못하리라. 과연 기술문명을 이끄는 자본가의 탐욕을 자연보호든 환경보호든, 아니면 어려운 서민들이나 공동체를 위해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영화는 너무 심한 모순을 갖고 제작된 영화이기에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씁쓸함은 지워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가 타당한 제안을 하고자 했다면 자본의 탐욕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지, 대충 내쫓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이끌고 있는 미국이라서 그런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도리어 영화가 돈을 벌기 위해 자연환경이란 테마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너무 자본가를 불신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실이 아니길 빈다. 그러나 우린 이렇게 모순적인 구도 속에서 산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아바타’는 그렇게 나에게 왔다.

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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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 : 최후의 결사단 - Bodyguards and Assas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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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척 오랜만에 본 애국의 영화였다.
  한국영화에서, 아니면 소위 선진국이란 국가에서 만든 영화들 속엔 사회나 집단을 우선시하는 분위기나 주제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집단수준이라 봐야 가족단위를 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금, 영화의 주제나 소재는 개인적 고민을 넘지 못하고 있고, 혹여 나온 사회라도 강압적인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기 일쑤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는 거부해야만 될 폭력의 기제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구의 영화나 일본, 혹은 한국영화조차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조국에 대한 애정이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대세다. 그나마 남은 가족조차도 종종 그 가치가 의문시되곤 한다. 현대는 집단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되는 시대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현실은 확실히 개인주의가 대세인 세상이다. 경쟁을 우위에 둔 신자유주의가 대세이다 보니, 상대와 더불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구현하려는 목표보단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은 일반적이다. 이런 분위기가 영화에 반영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인지 최근 영화들은 개인적인 문제의식이나, 집단과 개인과의 거리감을 주로 이야기한다. 즉, 집단과 개인은 서로 필요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영화의 목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영화에만 국한되진 않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는 개인과 사회의 거리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만 간다. 이럴 때 이 중국영화는 이런 분위기에 역행하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무척 낯설다. 무엇보다 개인의 희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다. 서구사회는 물론, 어쩌면 일본을 포함해 한국까지도 개인이 왜 사회를 희생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개인주의적 분위기에 대해 이 중국영화는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을 포함해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여건만 된다면 언제든지 바꿀 용의가 되어 있다. 현대인에게 태어난 고향은 있을지언정 평생 살고 싶은 마음의 고향은 없어졌다. 태어난 곳과 국적이 불일치하는 그런 시대다. 그러기에 사회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인생을 살면서 어느덧 사라진 어휘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그런 어휘들이 보인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격동의 시기인 20세기 초의 중국이 배경이다. 당시의 중국은 반식민지에 처한 힘든 시기이고, 외세에 시달리면서도 국내적으론 망해가는 청나라가 통치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중국민들의 고민을 아우르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착한 정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청나라 정부는 그러나 특권은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는 모순의 상태, 그것이 곧 영화의 배경이다.
  영화는 이런 모순되고 불운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나선 인물인 ‘쑨원’보다 그를 보호하는 자들에 초점을 맞춘다. 쑨원, 대만이나 중국본토나 모두가 존경하는 중국 최고의 인물이다. 좌우익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그를 지키는 자들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뼈대다. 그리고 그런 일은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국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홍콩에 입항한 쑨원을 보호하기 위해 역시나 목숨을 걸고 그를 지키기 위한 보디가드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선 이름없는 희생이 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조국인 중국을 위해 헌신한다. 영화 속에서 전부라고 할 수 없지만 그들 대다수는 자신이 아닌 중국을 사랑하고 기꺼이 희생할 인물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목적을 위해 희생한다.  

  그들의 희생에 대한 심심한 위로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그들의 짧은 약력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계층과 계급을 담고 있는 인물들이며, 그들은 모든 중국인들의 전형을 의미한다. 쑨원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된 인물들 중, 어는 누군가는 과거의 장군이었으며, 누군가는 상인의 아들이었으며, 누군가는 하루하루를 벌어 살고 있는 시장의 어느 조그만 가게 주인이다. 그 중 허드렛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 자도 있었고, 심지어 그런 인물들 중 부패하고 도박에 빠진 관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소 비약은 있겠지만, 중국의 미래를 짊어질 위기에서 자신들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지막 소망이 비록 중국 전체를 위한 희생이라 단정할 수 없지만 어느 순간에도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 산 자들이 아니라,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면들은 한국인들에게 사라진 그 무엇이었다.
  국가도 이젠 국제시장에서 선택되는 시기가 되고 있다. 마치 직장처럼 말이다. 서로가 능력만 있다면 자국의 국가대표자리라도 타국의 선수들에게 서슴없이 내주고, 그들이 큰 성과를 거두기만을 고대한다. 거꾸로 능력이 있는 개인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아낌없이 보상해주는 국가만 있다면 기꺼이 국적을 바꿀 생각에 오늘도 피땀을 흘리고 있으며, 다른 국가들의 Offer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희생에 대한 이야기는 100년 전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충성은 사라졌고, 국민의 보호는 그 국민의 능력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시기가 되고 말았다. 능력만 있다면 보호되지만 반대로 능력이 없다면 폐기될 수 있는 슬픈 현실이 우리들의 시간인 것이다.
  이런 정글의 시대에 이 영화는 마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고향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만 같다. 한국에도 한때,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회와 조국을 위해 달린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존재들이 한국 내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런 아쉬움에 대한 보충이라도 하듯 맘껏 희생하고 있다.  

  영화의 화려한 무술과 액션을 보면서 과연 중국의 무술영화를 따라올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견자단의 무술은 정말 환상적이기 그지 없다. 또한 중국에서의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마음껏 이미지 변신을 하며 영화에 혼신을 다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여자의 마음을 끄는 수려한 외모의 배우인 사정봉이 인력거를 끌며 사회의 하층민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에겐 큰 부담으로 작용했겠지만 용기를 냈고, 역시나 멋진 외모로 알려진 여명 역시 초라해진 모습의 걸인과 무사역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중국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판빙빙이 중년 부인의 역할을 하는 것 역시 눈 여겨 볼 내용이다. 그렇다고 다른 배우들이 이런 모험을 기피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 영화에서 달라진 모습으로 도전했다. 배우라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기존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한 그들은 분명 영화인으로서 앞선 사고를 지닌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들은 분명 영화 뒤에 중국정부의 요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설사 아니더라도 사회와 국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내용은 확실히 진부한 서사인 것도 사실이다. 너무 교과서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어서 그렇겠지만 관객들은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즉 공동체의 가치를 우린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을 지금 얼마나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더 이상 관심을 끄는 주제가 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야 하지 않을까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린 너무 개인적이고 타산적이면서, 혼자만의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 말이다. 그 속에 우리들의 소외와 고독이 또한 숨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중국영화는 우리들에게 과거의 우리들의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감정을 다시 일깨우는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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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0-01-2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놉만 봤을 때는 프로파간다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액션은 정말 뛰어난가 봐요. 무협영화를 좋아해서 보고 싶기는 한데.. 혼자 보러갈 것 같아 좀 꺼려집니다. ^.^;

novio 2010-01-28 14:27   좋아요 0 | URL
정부의 영향력이 작용한 영화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 본 사람들 대개가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만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높이는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혼자 봐도 괜찮을 것입니다. 영화는 혼자 보는 재미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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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고 기묘한 경험을 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현대인의 단절은 이 소설에서 너무 차갑게 묘사됐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이라고 할까? 아님 교과서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유일한 소설읽기 방법에 너무 취해서인지 이 책은 감동적인 서사도, 그렇다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어휘도 잘 보이지도, 그리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감정이 사라진 채, 아니 무미건조하게 모든 서사들이 기술된다. 마치 온기가 하나도 없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책은 이렇다 할 사건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아니다. 가장 극단적이라고 할 살인사건조차 어쩌면 어느 아침에 아침 식사하는 정도로만 묘사된다. 그리 큰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도망가는 장면 역시 그냥 길을 떠나는 어느 나그네의 행차 정도로만 느껴졌다. 아마도 작가, 페테 한트케가 기술하는 세상은 분명 그냥 평범한 시간들과 사건들이 의미 없이 쓰레기더미에 쌓여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특별할 것도 없고 기이할 것도 없는, 의식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고 지나갈 그저 그런 무의미한 날들로 구성된 것이다.
  페테 한트케의 이 소설은 그래서인지 당연히 풍부한 상상력을 담은 서사가 없다. 감동적이지도 않고, 또한 어느 공포소설의 작품처럼 특정한 모험으로 몰고 가는 긴장감도 없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서의 주인공은 세상에 거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일상을 살면서 평범한 것과 특별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미 그는 감정이 제거된 상태에 놓여서인지 자기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인간미가 떨어지기에 즉흥적이면서도 불안하기 그지 없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에서의 기존의 삶의 방식을 해석하는데 불안해하며 동요하고 있다.
  인간이 세상과 연결하는 통로는 언어가 가장 큰 매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에서 공인된 언어와 단어는 사회적인 상징과 의미, 그리고 철학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일반인이란 어휘엔 그런 사회적인 상징을 담은 언어들에 잘 적응하고 살아간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 블로흐는 그런 언어에 부적응하고 기존의 의미에 의문을 품기조차 한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재조명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주인공 블로흐는 그런 일반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거나, 부적응했거나, 아님 실패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멋대로의 인생을 살아버린다. 아니 사회에서 쓰는 언어를 주인공은 달리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만 같다. 이것은 어쩌면 삶의 자유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회는 공통의 언어와 느낌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회구성원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소외와 외로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블로흐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얻은 자유라서 불안하고 그래서 소외된다. 그의 이런 불안한 내면은 결과적으로 어처구니없는 살인사건에서조차도 행동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고 도망자의 감정 역시 느끼지 못한다. 도망자는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켰기에 순경이나 공권력에 공포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는 다른 세상으로의 진입을 해서인지 그런 공포는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그는 사태가 이렇게 됐으니 그냥 그렇게 행동한 것뿐, 그 자신에 대한 어느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이미 그는 도시라는 공간에 살면서 그런 감정이 거세된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국경선의 어느 농촌으로 갔다. 그러나 이미 거세된 감정이 농촌이나 한적한 곳이라도 다시 부활되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도 같은 고민과 부적응을 겪으면서 신문에서의 자신의 일을 보면서도 전혀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정신상태는 사회에서 이미 사용되고 통용된 문장이나 단어 속에 있는 사회적 상징에 의문을 품도록 만들며, 그 하나하나를 다시 뒤집어 생각하거나, 일상적인 언어 속에서 그 의미를 다시 재정의하려는, 좀 복잡한 인식을 하기 시작한다. 진부하면서도 평범하게 쓰이는 단어들은 어쩌면 의미의 전달이란 기본적 목적을 상실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진부한 언어들을 다시 곱씹어보며 그 의미들을 다시 환기하고 그 의미를 재조명하려 한다. 그런 방식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나 고민은 결국 실패한다. 그리고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 계속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불안에 압도되어 차라리 감정을 말살해버린 기계 같은 인간이 된 것이다.
  어쩌면 주인공 블로흐는 인간이 되고 싶어서였는지 언어의 재발견을 시도하려 한다. 그래서 세상과 소통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기존의 의미체계를 더 이상 평범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것에 의문을 하고 일상적인 것조차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상황에 갇히게 되며,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언어의 재발견을 통해 세상에 대한 그의 관점이나 상식구조를 재정립 못하면서 그는 세상과의 마지막 소통의 기회마저 끊어지고 만다. 주인공의 이런 실패는 세상과의 단절을 야기하면서 그를 더욱 고민에 빠뜨린다. 그래서 그가 사용하는 어휘들은 언제나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도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거나, 이해 못하거나, 아님 기억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주인공은 몰리게 된다.
  인간들이 표현하는 단어나 문장들 속엔 인간관계의 원활함을 이루기 위해 의례적인 어휘들이 많아지게 됐다. 그래서 그런 어휘나 문장들에 인간적인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쓰이면 좋을 뿐인 그냥 의례적인 어구들일 뿐이다. 블로흐는 그러나 세상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그런 것들을 해석하는데 골몰하며, 이런 과정은 도리어 그를 더욱 사회와 고립시키고 있다. 그는 이미 사회로부터 격리됐으며 심리적으로도 현대인들로부터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그는 언제나 타인이었고 상대 역시 타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과의 이야기에서 얻은 수많은 내용들은 그래서 그에게나 상대에게나 의미 없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나마 블로흐는 신문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고 있다. 어쩌면 신문은 세상의 이야기를 전달해주지만 인간이 아니기에 무미건조한 세상의 이야기만을 전달해준다. 그래서인지 살인사건에 대한 실마리나 소식 등, 경찰의 수사망이 그에게로 점차 접근함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이고 반감정적인 매체를 통해 전달하기에 타인의 이야기처럼 서술되고 있다. 그나마 그가 세상과 접한 방식도 인간미가 없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블로흐의 이런 모습은 현대인의 심리적 불안을 닮고 있다. 이 소설이 마치 지금 21세기 시작부터 거세게 불어 닥친 경제위기에 빠진 현대인들의 불우한 삶을 이야기하려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는 지금까지의 생활방식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래서 현대인들은 세상에 대한 인식의 재정립을 도모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모양새가 무척 부정적이고 단절적이다. 경쟁은 상대에 대한 날 선 공격성을 띠도록 만들었으며, 세상과의 단절을 이끌었다. 이런 상황은 전통적인 관계를 붕괴시키고 소통의 부재를 초래하고 말았다. 옆집 이웃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기억 못하는 현대인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블로흐가 기막히게 보여주고 있는 시점인 것이다. 과거보다 공간적으로 더욱 가까워졌으면서도 심리적으로는 더욱 멀어진 현대인들의 우울한 인간관계, 이게 현대인의 모습이다. 이런 환경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따스하게 만들기 위한 개인적 시도는 엇박자 내기 일쑤이고,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이런 불행한 관계를 이 작은 소설이 한 권에 담아놓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너무 현실적이면서도 잔혹하다고 느껴진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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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배우 되지 마>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나 같은 배우 되지 마 - 조연처럼 부딪치고 주연처럼 빛나라
류승수 지음 / 라이프맵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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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류승수,’ 솔직히 잘 아는 배우가 아니다. 영화를 자주 본 적이 많다고 여기는 나지만 그의 출연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신이 안 선다. 이 책은 나에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감을 갖고 있는 영화배우가 쓴 에세이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의 존재감 이상으로 무척 인상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고달픈 삶을 살아가면서 얻은 지혜가 풍부한 책이다.
  이 책은 자서전이 아니라고 저자 류승수는 이야기한다. 힘든 시간을 지나온 류승수란 영화배우는 자신의 과거도 담았고, 그때의 아픔과 고통도 담았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을 통해 얻은 지혜는 물론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기보다 현재의 나와 또 다른 연기기자를 꿈꾸는 그 누군가를 위해 이 책을 썼기 때문에 이 책은 인생 선배가 쓴 어느 특정 시점에 대한 고백이라고 여기기에 그는 자서전이란 이름을 쓰기를 거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서전보다 더한 흡입력과 생명력을 갖고 있는 이유는 현재에도 겪고 있는 자신의 조연급 연기자의 인생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이 책에 녹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주면서 자신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시작부터 어려웠고, 어떤 점에선 형편없는 모양새를 지녔던 저자는 비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도 어떤 영화에서나 조연이다. 그 속에서 조연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 그리고 희망을 품었던 과거를 현재의 자신과 관련시켜 너무나 인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류승수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가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자신의 실수가 무서워서이다. 그리고 연기는 혼자만의 지루한 도보가 아님을 언제나 이야기한다. 그가 쓴 책에서 특히나 많이 보이는 것은 언제나 관계였고 상대에 대한 배려였다. 혼자만 존재할 수 없는 사회와 그 사회의 축소판인 영화 찍는 장소는 언제나 나와 상대의 반응들이 층층이 존재하는 곳이다. 자신의 실수로 촬영의 OK 사인이 늦어질 수 있기에 한 컷 한 컷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완벽하도록 해야만 능력 있는 연기자로서 최고로 평가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가 걷는 힘든 길에서 그는 무척 행복한 배우인 것만 같다. 언제나 그의 진심을 알아주고 노력하는 깊이를 재어주며, 그리고 언제나 그의 힘들면서도 독한 노력을 알아주는 이들이 옆에 있기에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이 에세이는 아마도 그들에 대한 감사를 위해 쓰여졌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가 실수하고 절망했고, 또한 실패했을 때에도 기대를 해주었고, 그의 실수를 어떻든 감싸주려는 많은 이들이 있기에 조연 류승수는 지금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에세이에서 보이는 류승수란 배우의 과거, 현재는 어디선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어느 인간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니 같을 것이다. 삶을 지속하면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얻은 지식과 지혜는 저자 류승수가 얻은 것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연이 될 수 없지만 주연처럼 해야 한다는 자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 모두가 터득한 지혜이자 책임의식인 것이다. 그런 지혜를 류승수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보여주고 있고, 그것에 대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수긍하고, 동감하며, 또한 감동할 것이다. 어쩌면 만년 2위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 하나에 모두 포함된 것이다.
  류승수가 언젠가 주연으로서, 그리고 레드카펫에서 걸어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고 싶다. 그리고 상을 받고 그가 말하는 소감을 꼭 듣고 싶다. 어쩌면 그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로망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지은 이후, 연기자 류승수는 또 다른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런 책임감이 행복한 책임이었으면 한다. 그것은 희망과 연결되며 또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미래의 희망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책의 후반부에 연기자로서 갖춰야 할 자세를 적은 이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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