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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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고 기묘한 경험을 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현대인의 단절은 이 소설에서 너무 차갑게 묘사됐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이라고 할까? 아님 교과서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유일한 소설읽기 방법에 너무 취해서인지 이 책은 감동적인 서사도, 그렇다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어휘도 잘 보이지도, 그리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감정이 사라진 채, 아니 무미건조하게 모든 서사들이 기술된다. 마치 온기가 하나도 없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책은 이렇다 할 사건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아니다. 가장 극단적이라고 할 살인사건조차 어쩌면 어느 아침에 아침 식사하는 정도로만 묘사된다. 그리 큰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도망가는 장면 역시 그냥 길을 떠나는 어느 나그네의 행차 정도로만 느껴졌다. 아마도 작가, 페테 한트케가 기술하는 세상은 분명 그냥 평범한 시간들과 사건들이 의미 없이 쓰레기더미에 쌓여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특별할 것도 없고 기이할 것도 없는, 의식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고 지나갈 그저 그런 무의미한 날들로 구성된 것이다.
  페테 한트케의 이 소설은 그래서인지 당연히 풍부한 상상력을 담은 서사가 없다. 감동적이지도 않고, 또한 어느 공포소설의 작품처럼 특정한 모험으로 몰고 가는 긴장감도 없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서의 주인공은 세상에 거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일상을 살면서 평범한 것과 특별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미 그는 감정이 제거된 상태에 놓여서인지 자기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인간미가 떨어지기에 즉흥적이면서도 불안하기 그지 없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에서의 기존의 삶의 방식을 해석하는데 불안해하며 동요하고 있다.
  인간이 세상과 연결하는 통로는 언어가 가장 큰 매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에서 공인된 언어와 단어는 사회적인 상징과 의미, 그리고 철학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일반인이란 어휘엔 그런 사회적인 상징을 담은 언어들에 잘 적응하고 살아간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 블로흐는 그런 언어에 부적응하고 기존의 의미에 의문을 품기조차 한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재조명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주인공 블로흐는 그런 일반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거나, 부적응했거나, 아님 실패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멋대로의 인생을 살아버린다. 아니 사회에서 쓰는 언어를 주인공은 달리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만 같다. 이것은 어쩌면 삶의 자유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회는 공통의 언어와 느낌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회구성원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소외와 외로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블로흐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얻은 자유라서 불안하고 그래서 소외된다. 그의 이런 불안한 내면은 결과적으로 어처구니없는 살인사건에서조차도 행동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고 도망자의 감정 역시 느끼지 못한다. 도망자는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켰기에 순경이나 공권력에 공포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는 다른 세상으로의 진입을 해서인지 그런 공포는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그는 사태가 이렇게 됐으니 그냥 그렇게 행동한 것뿐, 그 자신에 대한 어느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이미 그는 도시라는 공간에 살면서 그런 감정이 거세된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국경선의 어느 농촌으로 갔다. 그러나 이미 거세된 감정이 농촌이나 한적한 곳이라도 다시 부활되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도 같은 고민과 부적응을 겪으면서 신문에서의 자신의 일을 보면서도 전혀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정신상태는 사회에서 이미 사용되고 통용된 문장이나 단어 속에 있는 사회적 상징에 의문을 품도록 만들며, 그 하나하나를 다시 뒤집어 생각하거나, 일상적인 언어 속에서 그 의미를 다시 재정의하려는, 좀 복잡한 인식을 하기 시작한다. 진부하면서도 평범하게 쓰이는 단어들은 어쩌면 의미의 전달이란 기본적 목적을 상실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진부한 언어들을 다시 곱씹어보며 그 의미들을 다시 환기하고 그 의미를 재조명하려 한다. 그런 방식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나 고민은 결국 실패한다. 그리고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 계속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불안에 압도되어 차라리 감정을 말살해버린 기계 같은 인간이 된 것이다.
  어쩌면 주인공 블로흐는 인간이 되고 싶어서였는지 언어의 재발견을 시도하려 한다. 그래서 세상과 소통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기존의 의미체계를 더 이상 평범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것에 의문을 하고 일상적인 것조차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상황에 갇히게 되며,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언어의 재발견을 통해 세상에 대한 그의 관점이나 상식구조를 재정립 못하면서 그는 세상과의 마지막 소통의 기회마저 끊어지고 만다. 주인공의 이런 실패는 세상과의 단절을 야기하면서 그를 더욱 고민에 빠뜨린다. 그래서 그가 사용하는 어휘들은 언제나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도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거나, 이해 못하거나, 아님 기억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주인공은 몰리게 된다.
  인간들이 표현하는 단어나 문장들 속엔 인간관계의 원활함을 이루기 위해 의례적인 어휘들이 많아지게 됐다. 그래서 그런 어휘나 문장들에 인간적인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쓰이면 좋을 뿐인 그냥 의례적인 어구들일 뿐이다. 블로흐는 그러나 세상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그런 것들을 해석하는데 골몰하며, 이런 과정은 도리어 그를 더욱 사회와 고립시키고 있다. 그는 이미 사회로부터 격리됐으며 심리적으로도 현대인들로부터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그는 언제나 타인이었고 상대 역시 타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과의 이야기에서 얻은 수많은 내용들은 그래서 그에게나 상대에게나 의미 없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나마 블로흐는 신문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고 있다. 어쩌면 신문은 세상의 이야기를 전달해주지만 인간이 아니기에 무미건조한 세상의 이야기만을 전달해준다. 그래서인지 살인사건에 대한 실마리나 소식 등, 경찰의 수사망이 그에게로 점차 접근함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이고 반감정적인 매체를 통해 전달하기에 타인의 이야기처럼 서술되고 있다. 그나마 그가 세상과 접한 방식도 인간미가 없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블로흐의 이런 모습은 현대인의 심리적 불안을 닮고 있다. 이 소설이 마치 지금 21세기 시작부터 거세게 불어 닥친 경제위기에 빠진 현대인들의 불우한 삶을 이야기하려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는 지금까지의 생활방식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래서 현대인들은 세상에 대한 인식의 재정립을 도모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모양새가 무척 부정적이고 단절적이다. 경쟁은 상대에 대한 날 선 공격성을 띠도록 만들었으며, 세상과의 단절을 이끌었다. 이런 상황은 전통적인 관계를 붕괴시키고 소통의 부재를 초래하고 말았다. 옆집 이웃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기억 못하는 현대인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블로흐가 기막히게 보여주고 있는 시점인 것이다. 과거보다 공간적으로 더욱 가까워졌으면서도 심리적으로는 더욱 멀어진 현대인들의 우울한 인간관계, 이게 현대인의 모습이다. 이런 환경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따스하게 만들기 위한 개인적 시도는 엇박자 내기 일쑤이고,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이런 불행한 관계를 이 작은 소설이 한 권에 담아놓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너무 현실적이면서도 잔혹하다고 느껴진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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