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단골가게 - 마치 런던에 살고 있는 것처럼 여행하기
이혜실 지음 / 라이카미(부즈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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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마도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이겠지만 말이다. 런던을 가는 것은 물론, 다른 여행지를 가는 여행객들의 목적이나 느낌이 모두 다르겠지만 새로운 곳을 만났을 때의 설렘은 만국 공통이라 할 것이다. 그런 설렘은 사실 이 책을 쓴 저자만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저자가 쓴 책을 통해 독자 역시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그게 여행 수필을 읽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멋진 디자이너를 꿈꾸며 런던으로 유학을 간 어느 여학생의 즐거운 쇼핑 여행기와 같은 이 여행기는 단순히 쇼핑 구매 장소나 시장을 소개하는 정도로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행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런던에 대한 느낌과 감정, 그리고 새로운 곳으로 향하고 만날 때의 설렘이 가득하다.
  넘치는 의욕으로 디자이너로서의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해 런던으로 간 저자의 마음이 매우 콩닥거렸던 것 같다. 새로운 것들에 감격하고 재미있어 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빈티지 속에서 신선하면서도 뭔가 색다른 런던의 매력은 저자는 물론 독자 역시 묘한 흥분을 일으킨다. 어쩌면 먼 이상향과 같은 영국 런던의 매력은 저자인 그녀가 가서 본 그곳들에 모든 것이 담겨 있을 것이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쉽게 찾아가서 볼 수 있고, 엄격한 계층사회에나 있을 법한 엄격한 참관요건이 필요 없는, 재미로 넘치는 상점들에서 말이다. 또한 이런 곳에서 예술의 매력이 숨쉬고 있을 것이다.
  빈티지, 이 단어가 책 속 어느 곳에서나 나온다. 현대 패션의 아이콘이 되고 있는 빈티지는 와인 숙성이란 어휘에서 나왔지만 이제 의류 등의 패션에 흔히 볼 수 있는 어휘다. 자칫 겉보기에 형편없어 보이는 것들만을 의미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이것은 결코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니다. 바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패션일 뿐만 아니라 과거 속에서도 그 진가를 제대로 집어낼 수 있는 패셔니스타들의 능력을 발휘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겉보기에 화려하고 예쁜 것들만을 좇는 것보다 숙성된 것을 통해 겉과 다른 속의 진면목을 찾는 것 역시 패션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빈티지는 과거 속에서의 현대적 매력이며, 혁명적이기도 하다. 저자가 찾아가는 것 속에서 타성에 절어 있던 모습이 새롭게 변모되고 진화되는 모습이 매우 부럽다. 그녀가 보여주는 많은 사진들 속에서 런던의 소소하면서도 즐거운 매력들, 그리고 그녀의 관심을 통해 알 수 있는 다양한 런던의 매력은 무한해 보였다.
  90년대 영국은 British Young Artists 즉 BYAs라는 새로운 예슬가들 덕분에 문화적인 변신을 겪게 된다. 산업의 침체로 인해 그리고 IMF 구제금융으로 인해 한없이 추락한 영국에서 이들은 신선한 감각과 인식으로 영국의 예술을 바꿨다. 그런 변화에 힘입어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공장을 미술관으로 바꾸는 모험을 했고, 벽의 낙서 속에서 대단한 미적 감각을 발휘하는 이들 덕분으로 런던은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예술이 변화를 겪게 되기도 했다. 허스트 등의 작가들의 솜씨를 담은 예술작품들이 경매시장에서 엄청난 고가로 팔린 것들은 모험적인 상업성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선입견을 깨는 엄청난 변화의 물결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변화가 이 소소한 일상을 담은 책에서 자주 등장하고, 또한 이미 BYAs들의 문화적 성과가 이미 런던에서 일상화됐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을 보니까, 런던으로 가서 그녀가 밟았던 그 길들을 걷고 싶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되네 이게 할 장소들을 들러서, 저자가 느꼈던 그 감정도 느끼고 싶다. 아마도 영화 속의 장면보다 책에서 소개한 그것들을 더 많이 생각할 것 같다. 여행수필의 매력이 이런 것이리라. 언젠가 런던에 가게 되면, 그 때 나름의 추억을 다시 만들고 싶다. 그래도 이 책 덕분에 풍성한 것들을 더욱 많이 만들 것 같다. 런던,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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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랜턴: 반지의 선택 - Green Lanter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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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점점 경쟁이 치열하고 살기 어려워서인지 천하무적일 것 같은 초인간들이 세상의 쓴맛을 느끼면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영화들이 많아졌다. 사회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그들의 작업에 심한 피로감을 느끼거나 회의를 느끼는 상황이 영화 속에서 보이고, 자신의 경제적 문제에 시달리는 영웅들이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하늘에 살던 신들이 지상의 인간으로 변하면서 겪는 고충이랄까? 이런 류의 초인간적인 영웅들은 분명 인간적이고 바로 옆에 있는 우리들 같다. 그리고 인간이 겪고 있는 고민들을 듬뿍 갖고 있는 이들의 활약을 보면서 어느 순간 관객들이 현재 겪고 있는 현실적인 고민들을 또한 초인간들의 영웅 영화에서 느끼게 됐다.
  초인간들의 활약을 담은 영화들은 평범하게 살고 있는 인간들의 고민을 말끔히 날려버리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과 다른 가치관과 확고부동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대단한 괴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통해 현실의 괴로움을 날려 버리는 즐거운 시간도 갖게 된다. 하지만 인간에 보다 접근한 영웅들이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면서 이런 기쁨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현실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갔던 극장에서 고민만 잔뜩 갖고 오는 꼴이다. 그런 영화관람이 너무 흔해진 지금, 시름을 달래기 위해 갔던 극장의 영화들이 도리어 시름만 계속 주고 있는 상황이다.  

 

 


  좀 재미없어졌다. 고민을 위해 극장에 갈 영화들은 솔직히 많다. 하지만 고민을 날려 버리고 단순한 재미를 위해 갈 극장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초인간적인 영웅영화에서 삶을 성찰하게 되고, 사회의 모순이 고발되며, 영화 속 악당들도 자신들의 악행이 다 이유가 있게 됐다. 과연 그들을 처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문제까지 영웅영화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배트맨은 주인공 자체가 고민의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스파이더맨은 평범한 그들처럼 학교와 생존에 부대끼면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명문 Columbia University에 다니는 수재이지만 삶의 질곡에선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을 짊어지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위해 의협심을 발휘하는 DNA 돌연변이 인간의 모습은 자신의 삼촌에게 받은 영향이 깊긴 하지만 그래도 안쓰러울 뿐이다. 솔직히 그들의 노력으로 세상이 바뀔지 의문이 될 만큼 사회의 부조리로 인해 탄생하는 악당들은 끝이 없다. 즉 사회의 만행에 대한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린랜턴은 그래서 반갑다. 사회적 냉대를 받은 친구가 악당이 되는 과정이 있긴 하지만 선악의 분명한 구분 속에서 정의로운 활동이 멋있어 보인다. 인생의 실패자일 것만 같은 이가 정의를 실현하고 사랑도 얻는 것은 분명 동화 같은 비현실성이 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고 싶은 그런 모습이다. 또한 여타 행성들 속에서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용기의 가치를 통해 공포를 극복하는 모습은 분명 인간의 한계와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의성도 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인간의 노력과 용기,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목표인 셈이다.  

 

 


  뻔하다는 비판, 이 영화는 이런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그것은 배트맨과 같은 영웅영화로 진화한 현대의 관객들이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과거가 과연 오늘의 가치를 상실할까? 그리고 단순한 영웅 이야기가 과연 배트맨보다 무의미할까? 고민 속에서 내린 결론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호하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보여주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고민의 시간 속에 파 뭍인 현대인들에 있어 과연 자신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기회가 더없이 반가울 수 있다. 그린랜턴은 그런 영화다. 과감하게 성찰을 삭제하면서도 분명하게 가치 있는 인간의 자세를 보이고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지루하지 않게 보여주는 영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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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개 - Poong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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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상, 제대로 된 배역을 잡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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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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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그 때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로 이행되는 과정이었지만 공고화됐다고 하기엔 너무 열악했다. 한나라당의 전신이었던 민정당의 독재권력이 물러났지만 사회 곳곳에 극우단체들과 반민주세력이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 세력으로 건재했고, 독재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던 기대가 무너진 시대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했던 여러 양심선언들이 봇물 터지듯 나왔던 시절이었다. 그들의 용기로 한국 사회의 선진화가 이루어졌지만 양심선언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기에 당시엔 두려움이 교차됐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두웠던 시절이었다.
양심선언이란 것 자체가 그 시절의 우울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사회의 제도와 법으로는 결코 올바른 사회질서를 구축할 수 없기에 개인의 입장에선 최후의 수단일 수밖에 없는 양심선언은 거대세력에 당당히 맞서야 하는 용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패했을 때의 공포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양심선언을 보호해줘야 할 이들에게도 똑 같은 용기를 요구한다. 이렇듯 위험한 일을 한 이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 영화가 ‘모비딕’이다.  

 

 


영화는 이미 15년도 더 된 과거의 시간을 배경을 들여다본다. 우아하지 못했던 그 시절을 통해 오늘의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특히 거대세력으로 인해 한국사회가 움직인다는 음모론으로 오늘의 한국사회의 면모를 살피고 진단하는 특색 있는 현실고발의 영화다. 정부 위의 정부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는 현실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겐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국민들의 이해와는 다르게 진행되는 정치를 보면서 국민들은 좌절하고 분노하게 되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은 부도덕이 판치는 사회는 1994년이나 오늘이나 그다지 차이를 볼 수 없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물론 여당과 야당도 어떻게 못하는 사회의 부를 독점하는 세력들의 음모와 획책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사건과 희생, 그리고 한국의 우울한 자화상이 영화 속에서 매우 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다.
정부 위의 세력이 가장 잘 사용하는 전략이 사실 왜곡이자 축소다. 그래서 ‘당신이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진실입니까?’ 라는 이 당돌한 질문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무거운 논제였다. 한국사회를 자신의 이익으로 이끌려고 하는 권력집단이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에까지 그 힘을 미치고 있으며, 진실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진실 역시 왜곡시키는 장면에서 심각한 우울을 경험가게 됐다. 심지어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임무를 지닌 언론사 역시 그런 상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스토리는 그래서 공포를 자아내기까지 한다. 그래서 소설 ‘모비딕’에서의 이야기들은 영화 ‘모비딕’의 기본 전제까지 만들고 말았다. 결코 믿을 수 없는 진실들이 있으며, 그것은 모두가 알아야 할 것들이지만 그것을 막는 세력으로 인해 잘못 알려짐으로써 사회의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연기자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캐릭터들과 관계들을 통해 관객들이 볼 수 있는 현실과 그 위기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반국민들의 위기를 쉽게 만들어내는 음해세력들의 실상이 가상현실을 통해 드러남으로써 민주주의의 현위치를 보여주게 되며,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실감하게 하는 효과를 갖추게 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용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평범한 진실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음해세력에 대항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선 다행한 일이지만 과연 그런 세력이 현존할지 잘 판단이 안 선다. 그것은 곧 1994년의 위기가 과연 2011년에 해소됐는가 하는 질문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아마도 답변에선 긍정적일 것 같지 않다. 왜냐 하면 지금도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내부고발자의 문제는 지금도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부 위에 있는 세력에서만이 아니라 정부기관과 그 산하기관은 물론 현재의 모든 기관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해와 만행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내부고발자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지만 그들을 보호하는 사회안전망은 아직 요원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그들을, 한국사회는 아직 보호해주지 못하는 미개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해피엔딩이 그래서 반갑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열망이 영화 속에서라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지독한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어쩌면 후속편을 제작하기 위해 그런 세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르겠고, 또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그런 구성을 띄게 됐는지 모르겠다. 우악스런 현실 앞에 압도되어서 허우적거리는 인물보다 그래도 일을 잘 해결해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들을 보고 싶은 것이 관객이고 바로 한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됐으면 하는 바람은 물론, 희망도 품고, 또한 용기를 낼 수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보는 내내 재미있었고, 즐거웠고, 미처 몰랐던 민주주의의 참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고맙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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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 Waltz with Bash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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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피, 어쩌면 인간이 갖고 있는 근원적 갈망일 것이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아니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욕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망각이 존재하고 환락이 존재하고, 외면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도피를 할 수 있을까?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은 이런 철학적 물음 위에 이루어진 불행한 과거사의 조명 영화다.
  기이한 시작이었다.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의 친구의 꿈을 갖고 주인공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는 시작, 말이다. 충격은 외부로부터 왔다. 타성에 전 한 명의 인생이 친구의 꿈 이야기와 그 해석에 송두리째 바뀌는 장면이기도 했다. 어느 유명한 배우가 나와서 연기하는 것이 아닌, 애니메이션을 통해 제공된 어느 중년 남자의 캐릭터를 통해 보이는 모습은 독특한 인상을 풍겼고, 사실보다 더욱 사실적인 모습을 띄게 됐다. 이 영화,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스라엘 영화라는 점과 함께 정말 뭔가 독특했다.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경험했지만 망각 속으로 침잠했던 과거를 찾기 위해 그가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장면들은 의미심장했다. 그것은 어쩌면 망각 속의 과거가 자신만의 경험도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고 또한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내는 효과를 지닌 장치다. 그가 만난 친구들이나, 관련자들과의 대화는 그래서 의미심장했다. 1인칭 주관적 관점에서 보긴 했지만 주인공의 개인적 이야기와 고민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닌, 일반화되고 집단화되며, 또한 혼자만의 고민이 아닌 것이 된다. 즉 동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의 고민이자, 결국 망각과 도피가 됐던 것이다.
  이 묘한 장치는 관객을 이상한 세계로 끌고 가는 환상적 코드를 지니고 있다. 그 속에서 자신 역시 주인공의 경험을 공유하게 되고, 공감하게 되고, 그리고 책임감이라 할지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뭔지 모를 고통을 느끼게 된다. 즉 충격이었다. 자신도 그때 그곳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한 주인공이나 그런 사실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하면서도 모른 채 하는 동시대의 인간들의 무관심 역시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처럼 어쩌면 망각하면서 도피하려고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망각과 도피는 꿈이란 또 다른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다시 주인공과 그 친구들에게 다가 왔고, 그런 그들을 영화를 통해 보는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잊고 싶어서 잊고 있었던 과거를 다시 재생하기 위해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는 어느 영화감독의 이야기는 그래서 슬프고 무서웠다. 간접적으로만 확인된 현실을 찾기 위해 마치 로드무비처럼 친구들과 관련자들을 만나기 위해 떠난 그의 여행에서 레바논에서 벌어진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학살의 참상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애니메이션이자 한 개인의 과거사 찾기라는 주관적 설정이지만 그러나 내용은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며, 충격적이었다. 그런 것들에 의심을 품은 관객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의 참상을 실사로 보여줬는지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꿈처럼 전해진 이야기가 실제로는 사실임을 여지없이 보여준 명장면이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꿈에서 깬 주인공과 관객들이 마주한 현실을 보여주는 멋진 구성이기도 하다.
  20년이라면 과거와 단절되면서 현실에 안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봤을 때, 그것은 결국 오해다. 현실은 과거와의 지독한 관계 속에서 만들어져 가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나마 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망각일 것이며, 역사적으로는 역사왜곡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 한 편에 도사리고 있는 망각으로 감춰진 공포는 항상 그의 옆에 있으며, 그의 생활 하나하나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이 이 정도인데, 한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가 공유하는 역사적 아픔을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 정치적 놀음으로 인해 정치유력인사가 살해되고, 그에 대한 피의 보복을 위해 엄청난 대량학살을 자행한 집단과, 자신과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만행을 방관한 이스라엘 군대는 그 행위로 인해 그 이후의 인생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이 영화는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평화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원한과 증오, 그리고 불편한 진실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바시르와 왈츠를’이란 영화제목, 매우 역설적이다. 학살의 비극이 누군가에게 즐거운 파티와 같다는 이 역설은 영화 곳곳에 넘친다. 그리고 원수만 같다고 여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도 인간적 관계가 있으며, 죽고 죽이는 것이 그들간에도 결코 편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한 군인의 입장에서 전쟁의 당위성은 차치하고라도 공포감으로 인해 인적이 드문 곳에 총질을 계속 한다던가, 군인들간의 총격전을 마치 전쟁놀이를 보듯,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는 장면, 그리고 상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춤을 추듯 총을 난사하는 장면들은 비극과 희극이 기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정말 묘한 파티에서의 왈츠를 추는 듯한 인상도 받게 된다. 그래도 비극이겠지만 말이다.
  과거를 망각한 그는 전쟁의 가해자였지만 사실 피해자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와 그의 친구들 역시 사실 끌려와서 전쟁군인으로 복무했을 뿐이다. 레바논 침공 동안, 그들의 조국, 이스라엘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그들의 생활을 보냈고 즐겼다. 언젠가 제대를 할 것이겠지만 군인으로서의 복무기간 동안 군인으로서의 그들의 책임과 복무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그냥 어디선가 일을 하고 있었던 무가치한 존재였을 뿐이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소외된 자로 살아갔던 그들의 고통은 동시대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고, 허술하게 처리됐다. 
  과거를 망각했지만 죄책감이 떠난 것은 아니었고, 꿈을 통해 그는 그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이다. 즉 그들은 심적 고통으로 인해 아팠던 것이다. 이유 없이 총을 쏴야 했던 이들의 고통이 주목 받지 못하면서 그냥 도망치듯 과거를 망각하고 살았지만, 꿈이란 방식으로 그때의 비극적 참상은 그와 그의 전쟁 친구들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그 꿈 속에서의 모습은 언제나 악몽이자 비극의 모습, 그것이었다. 현실과 꿈 사이, 어디에도 그들은 편한 모습으로 살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도 그때의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였던 개들이 꿈 속에서 자신을 쫓는 모습에서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고 싶지만 과거를 결코 지울 수 없는 법이다. 가련한 인생이 그 속에서 양산되는 것이다. 이런 비극을 이 영화는 역설적인 제목을 통해 이야기한다. 전쟁은 결코 피해자도 가해자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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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자 2011-08-05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축하드려요!^^
많이 잊어버렸지만, 예전에 봤을때 정말, 전쟁에 대한 시선이, 너무 역설적이게도 감각적인 영상으로 표현됬었던것 같아요. 말씀하신대로 비극과 희극을 동시에 맛보는 그런 장면들 참 인상적이었는데 말이죠. 역사적 맥락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았다면 더 와닿았을텐데 그땐 그렇지 못했네요.(지금도 비슷하지만;) '현실은 과거와의 지독한 관계에서 만들어져 가는 것..' 문득, <오월애>와, 시민분들이 하신 얘기들이 떠오르네요..

novio 2011-08-06 17: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 영화, 정말 의외의 충격을 줬습니다. 그리고 망각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느꼈구요. 좋은 날 가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