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010년 1월 1주 !

  예술의 꽃을 피우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불살랐지만 고통스런 인생을 산 여류화가는 확실히 매력적인가 보다. 그래서 영화는 언제나 그녀들 주변을 맴도나 보다. 그리고 그녀들에 관심을 갖고 또한 그녀들의 매력을 집요하게 형상화한다.
  근대 미술이 탄생한 이후 많은 여성들이 미술계에 진출했지만 고달픈 인생의 여정은 그녀들 주위를 언제나 맴돌았다. 그녀들의 인생은 항상 드라마틱했지만 그녀들의 인생은 환상적이지도, 평범하지도 않았다. 남성에게 버림받고, 힘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동서양을 불문했나 보다. 한국 최초의 근대화가인 ‘나혜석’이 노숙자처럼 생을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인생이야기는 미술을 업으로 한 여성이 예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지금과는 다르게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모습은 한국만의 사항은 아닌 듯 하다. 여류화가로서의 비극적인 삶을 산 세 명의 여성은 영화로 매우 극적으로 형상화됐다.
  남자에게 버림받거나 육체적 장애로 고통을 겪거나 한다. 또한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해주지 못한 사회에서 힘들게 생활하곤 한다. 그래도 그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리라.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길은 작품 밖엔 없었고, 자신들의 힘든 인생을 작품으로 보상받으려 했다. 그러기에 그녀들은 작품에 모든 것을 걸었고 그곳에 그녀들의 열정, 노력 등을 쏟아 부었고, 그래서 그녀들은 집착과 광기에 사라 잡히기도 했다. 그녀들은 그렇게 인생을 살고 마감했다. 그런 인생을 산 그녀들엔 ‘세라핀 루이,’ ‘카미유 클로델,’ 그리고 ‘프리다’가 있다. 
   

세라핀 (Seraphine, 2008)  

 

  천재성에 비해 명성을 갖지 못한 여성 화가의 슬픈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녀의 말년은 정신병원에서의 삶이었을 만큼 그녀는 사회의 무시와 냉대, 그리고 자신의 광기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 우연한 기회로 감독 ‘마르탱 프로보스트’의 관심이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그녀에 관한 영화가 나오게 된다. 적은 예산으로 만든 영화라서 개봉관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단과 관객들의 극찬으로 명품 영화의 가치를 얻게 되고 마침내 프랑스 전역은 물론 한국에까지 개봉된 작품이다. ‘욜랭드 모로’는 ‘전미 비평가 협회상’과 ‘LA 비평가 협회상,’ ‘노포트비치 영화제,’ ‘세자르 영화제’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 역시 뉴포트비치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세라핀 루이’는 하녀였다. 전문적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지만 독학으로 천재적인 능력을 개발했고 그런 노력으로 자연의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을 창조한다. 1928년 그녀의 주인이었던 ‘빌헬름 우데(Wilhelm Uhde, 1874-1947)’가 그녀의 천재성을 확인하고 그녀의 patron이 되면서 그녀를 적극 지원한다. 이후 그녀는 또 다른 천재화가인 ‘앙리 루소’와 함께 ‘나이브 아트’의 대표주자로까지 발돋움한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모든 것이 바뀌게 됐다. 공황으로 그녀에 대한 우데의 지원이 끊기게 됐고 경제난, 사회적 편견, 그리고 전쟁과 함께, 급기야 정신병까지 앓게 되면서 정신병원에 입원, 이후 그곳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녀는 자연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녀의 작품은 주변에서 흔히 자연적인 소재들을 엿볼 수 있다. 즉, 꽃, 나무, 물, 야생열매, 들풀 등이 그것으로, 평범한 대상들을 화려하고 원시적인 색감으로 형상화하면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까지 가세, 묘한 강렬함을 살린 작품들을 선보였다.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988)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최고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제라르 드파르듀)’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녀의 천재적인 예술적 능력을 확인하고 그녀를 발탁했으며,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녀를 버린 남자이기도 하다. 이 둘의 관계는 영화의 중심이 있으며, 로댕과의 관계를 통해 까미유 끌로델(이자벨 아자니)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이자벨 아자니의 눈부신 연기를 확인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카메라맨 촬영감독이었던 ‘브루노 누이땅’의 첫 번째 연출작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걸작을 만들고 말았다. 이자벨 아자니는 이 작품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세자르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세기 프랑스 최고의 조각가인 ‘오스뀌드 로댕’의 연인으로만 알려졌던 까미유 끌로델은 언제나로댕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녀의 시작이 로댕으로부터 시작됐고 그의 모델이 되기도 했지만 마지막 역시 그가 그녀를 버림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또한 이런 비극적인 결말의 또다른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19세기 후반 파리, 독립적인 여성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억압으로서 조각가가 되고자 했던 끌로델은 이 사회적 장벽을 넘지 못했다.
  스승이었던 로댕과의 사랑과 불륜으로 가족에게 버림받은 채 무려 생의 마지막 30년을 정신 병동에서 보내고 만다. 또한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가난과 광기로 인생의 후반을 보내고 만다. 또한 점차 확고해진 로댕의 명성과는 반대로 그녀는 이름없는 예술가의 비극적 삶만을 부여 받았다. 마지막 엔딩에서 볼 수 있는 동생에게 보내는 슬픈 편지는 그녀의 인생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로댕의 비극적 연인으로만 기억되던 카미유 클로델의 치열한 삶을 뛰어나게 조명해냈다.

프리다 (Frida, 2002) 

 

  1983년 헤이든 헤레라(Hayden Herrera)의 책 [프리다]가 출간되고 나서야, 당시엔 무명이었다 ‘프리다 칼로’란 멕시코 화가에 관심을 갖게 된 프로듀서 ‘낸시 하딘’는 10여 년간의 힘든 활동을 통해 마침내 줄리 테이머를 감독으로 그녀를 영화화하게 된다. 멕시코 출신의 배우 ‘셀마 헤이엑’이 그녀의 그늘진 인생을 연기했고 오스카상에서 분장, 음악상 등 2개 부문 수상했다.
  그녀의 작품은 현재 최고가로 거래되고 있지만 생의 상당 시간 무명이었다. 또한 그녀의 이름엔 언제나 그녀의 남편이자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가 나오게 된다. 디에고 리베라 (알프레드 몰리나)는 까미유 끌로델에서의 로댕과도 같지만, 어쩌면 프리다에겐 더욱 가혹한 존재였다. 18세에 버스 사고를 당하면서 하반신이 마비되는 불운을 겪게 된 것을 시작으로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난잡한 사생활로 마음 편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 영화에서 표현된 그녀의 불운한 인생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미모와 열정, 그리고 인생을 그림에 쏟아 붇도록 만들었고 영화는 객관적으로 그런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극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지만 호평이 조금 우세한 편이다. 또한 그녀의 사상을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기도 하다. 그녀는 양성애자였으며,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역시나 일자로 된 그녀의 눈썹은 그녀의 상징이 됐고, 도전적인 인생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활력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불운이기보다 투쟁적인 그녀의 인생을 다시금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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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1-1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본 건 『까미유 끌로델』하나 뿐이네요. 이 영화 다소 불순한 의도로 빌려보았다가 충격 받은 영화 중 하나죠. 그 명단은 『베티 블루』, 『하이힐』, 『하몽하몽』등이 있습니다. ^.^;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저 둘의 관계는 잘 모르겠어요. 로댕이 그녀를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사랑으로 작품이 서로 닮아진 것인지.

novio 2010-01-12 17:09   좋아요 0 | URL
불순한 의도?^^ 까미유 끌로델은 말씀처럼 해석하기 나름인 것 같더군요. 저도 쓰다보니 로댕이 버렸다고 썼네요. 아마도 일반상식 선에서 쓰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란 것이 다 그런 것 같네요. 시선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 만약 저도 까미유 끌로델을 다시 본다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현대 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김영숙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전통과 변화, 두 가지의 균형을 추구하는 에세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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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영 (Ga Young) - Flor de Tango (탱고의 꽃)
피아졸라 (Astor Piazzolla) 외 작곡, 가영 (Ga Young) 연주 / 유니버설(Universal)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한국인의 부끄럽지 않은 T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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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영 (Ga Young) - Flor de Tango (탱고의 꽃)
피아졸라 (Astor Piazzolla) 외 작곡, 가영 (Ga Young) 연주 / 유니버설(Universal)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나와 Latin은 관계는 무한하다. 과거 Mexico의 Tijuana에서의 잠깐의 체류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끼쳤다. 그리고 내 또 다른 고향인 Arizona, Tucson 역시 라틴을 공부하기 위해 간 나의 유학 장소였다. Mexico와 국경을 접한 Arizona는 라틴을 공부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역시 나의 닉네임인 ‘Novio’라는 스페인어는 나의 또 다른 상징이 되고 있다. 나와 무관하지 않은, 아니 나의 또 다른 반쪽이 되고 있는 라틴은 지금까지 내 학업과 연구의 대상이었으며, 지금 역시 무관하지 않다. 그들의 사회문화, 그리고 정치와 경제는 언제나 내 연구의 상대였고, 그들로부터 얻은 지혜는 끝이 없다. 그래서 라틴의 문화, 그리고 예술은 언제나 날 흥분하게 만든다. 그 속에서의 Tango 역시 나에겐 흥분을 일으키는 중요한 존재다.
  Tango, 정열의 노래다. 그러나 그 속엔 타오르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한이 서려있다. 그래서 슬프다. 정열과 한이 역설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이 기묘한 음악은 아르헨티나의 슬픔과 그 인내를 담고 있다. 강한 절도 속에서 피아노와 현악기의 강한 리듬은 결코 슬픈 감정을 공유할 뿐 결코 편안하거나 즐거운 하루를 연상시키지 않는다. 그게 Tango다.
  Tango, 거칠다. 현악기는 파괴적인 리듬을 통해 드럼보다 더 강한 비트를 들려주며, 피아노는 전자악기보다 더 파괴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그러나 이런 강함 속에서도 슬픔을 형상화하는 여유와 감미로움을 동시에 갖춘 genre다. 이민자들의 천국이었던 아르헨티나의 마음을 Tango는 슬픔을 여유와 힘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어두운 밤의 어느 Bar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달래고 그들 간의 흥겨움을 위해 마련된 Tango는 어느덧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 우리 모두가 즐기는 음악이 됐나 보다. 그래서 이런 이국의 음악을 아르헨티나에선 이방인인 가영 (ga young)은 이질감을 느낄 수 없도록 표현하고 있다.
  가영, 대단한 음악가이다. 그리고 너무나 반가웠다. 듣기 힘든 Tango란 Genre를 갖고 이 독특한 앨범으로 나의 라틴문화에 대한 갈증을 해결해 줘서이다. 또한 이질적인 문화 속에 나온 음악 Genre를 라틴의 방식으로 해석한 점에서도 그렇고 어떤 새로운 감각의 재즈적인 감성까지 불어넣고 있다. Viola의 수준 높은 감성을 정열과 우울, 그리고 고전과 현대를 적절히 조화시키는 능력은 개인적인 경험으론 듣지 못했다. 아마 내가 들었던 최고의 Viola 연주자이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 역시 무척 만족스럽다.
  첫 번째 음악인 [인생의 회전목마]는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의 친근함이 묻어나지만 그러나 어딘지 모를 비극성을 내재한 곡이다. 그러면서도 우아함이 깃들여 있는 이 곳은 Viola의 감성이 가장 잘 실현된 음악일 것 같다. 무거움과 연약함이 동시에 표현되도록 한 피아노와의 절묘한 조화는 그들의 연주 능력만큼 뛰어나다.
  세 번째 음악인 [La Cumparista]는 가장 Tango적인 노래로 역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음악인 것 같다. ‘플라멩고’의 강렬한 리듬이 들리는, 도시 하층민들의 우울함이 기묘하게 결합된, 이 음악엔 도시 속의 우울을 공유한 남녀의 춤이 멋지게 연상된다. 특히 Viola의 구슬픈 음악은 춤곡이면서도 어느 비극의 서사가 느껴진다.
  [Tango Blues], 천천히 시작되는 음악은 긴장을 고조시킨다. 언제나 타악기에 버금가는 피아노의 강한 리듬은 어느덧 고요한 밤거리를 연상시키듯 차분하다. 그런 배경 속에서 한 Viola의 연주는 마치 갈곳 없는 도시인의 심정을 위로하듯 유연하게 들린다. 클래식 기타와의 조응은 그런 유연함과 우울함을 동시에 들려주면서도 어느 순간 느끼는 정열을 들려준다.
  재즈의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Cabaret]은 확실히 화려하고 우울한 밤거리의 노래다. 종종 들리는 피아노와 Viola와의 불협화음은 듣는 이를 긴장시킨다. 고전기타 역시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을 들려주듯 묘한 기분을 만들어 준다. 뉴에이지 풍의 이 Tango는 어느덧 전위음악과도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Pablo de Malaga], 좀 기묘한 제목이다. 말라가의 피카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음악 속에서 느껴지는 아랍풍의 음악 역시 이채롭다. 오랫동안 이베리아 반도의 주인이었던 사라센인들(무어인)의 문화적 영향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런 민족의 후손이 건너와 세운 나라인 아르헨티나 역시 그런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기이하게 증명하는 노래인 것 같다.
  [Valse Triste No.2], 역설적인 제목이다. 신나는 춤곡의 대명사인 왈츠가 Tango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느 순간 도시인의 우울한 감성을 표현하고 있다. 내 음악적 지식의 한계가 있어서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우울한 왈츠를 들어본 적은 없다. 환상적인 피아노의 선율 속에서 Viola의 애절한 감성이 이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어떤 서사를 느끼게 만드는 이 곡이 개인적으로 이 앨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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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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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비극의 끝은 없었다. 그냥 끝까지 비극으로만 가고 있었다. 그나마 마지막 희망이 위안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영화나 서사적 장치라고 느껴서인지 위안이 되지 못했다. 결국 슬펐다.
  기대가 컸고 그 기대에 부응한 작품이었다. 어쩌면 지루했을지 모르는 로드무비였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이 줄지 않았다. 언제나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이 영화 곳곳에 산재하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위기를 느끼게 만들었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영화는 마치 비극 꾸러미를 풀어헤치듯 그렇게 힘들게 진행됐다. 이런 위험 한가운데 위치한 불행을 짊어진 아빠와 아들의 머나먼 행로는 그래서 슬펐다.
  영화 속에 나온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연의 보복은 냉정하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의 배경은 추운 겨울이나 아니면 화산재로 뒤범벅이 된 것처럼 보였고, 시시때때로 비가 내렸다. 화면은 회색을 덧칠한 듯 보였고 머나먼 길을 갈 때의 길의 끝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인류에겐 지구의 최악의 사태 이후의 생활이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할 수 없다. 또한 위험하기조차 하다. 

  인류의 문명은 끝났다. 영화는 그 이후의 생존자들에 관한 영화다. 단 둘이 주인공이지만 결코 둘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간은 영원하겠지만 인류의 문명은 언젠가 끝일 것이며 바로 인류의 문명이 끝난 것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문명의 끝, 바로 그 순간 인류는 문명인이 더 이상은 아니다. 영화는 그런 인간의 야만성을 슬프게 담았다. 그 속에 있는 가족의 사랑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가족 중 한 명인 아내는 인류문명의 멸망 이후 자살을 선택한다. 최소한의 우아함을 지키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낳을 아이를 거부했다. 그 아이가 인류 최후가 된 시점에서 결코 문명인으로 살 수도, 살 기회도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바로 반대편에 있는 아빠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최소한 아이의 생명만이라도 지키고 싶은 부정은 결국 아들을 데리고 기약 없는 남쪽으로의 여행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들의 여정이 이 영화의 전부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더 이상은 문명인이 아니었고, 원시적인 그 어떤 모습이었을 뿐이다.  

  인류의 어리석음에 대한 결과로 지구의 마지막 시간을 살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 와중에서 생존한 인간들이 선택한 선택은 많을 수 없다. 주인공인 부자가 선택한 것이라곤 남쪽의 어느 바다로 가는 정도. 그러나 간다고 해서 어떤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은 아빠도 알고 있고 아들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했던 남쪽으로의 여행은 뚜렷한 목적도, 그에 대한 기대도 없었던 막연한 여행이었다. 그런 여행을 지탱한 것은 아빠의 아들 사랑이었을 뿐이고, 그게 전부였다.
  막연한 희망이나마 그런 희망을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아들의 생존을 보장받고 싶었을 것이고, 최소한이나마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확률이 얼마이든 아빠로선 포기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무모한 여행, 그 여행 속에 담겨있는 아빠의 부정은 절실함으로 나타난 것이다.  

  소설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는 언제나 극단적인 상황을 묘사한다. <핏빛자오선(Blood Meridian)>이 그랬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도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더 로드(the Road)>에서 보인, 그에 의해 구체화된 생존을 위해 마지막 극단까지 가고 있는 식인종의 모습은 예상은 했지만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모습은 어느 식인종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문명 붕괴 이후의 현실이었다. 인간다움이 사라진 잔인한 배경은 위험하고 막연한 남쪽으로의 절실한 여행은 너무나 위태롭다.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여행, 바로 이 영화의 비극성이 더한층 강해지는 이유다. 그러기에 더욱 절박한 아버지의 행동은 처절했다. 
  여행하는 과정에서 갈등하는 부자의 마음의 핵심에도 이 절실함이 담겨있다 아빠로서의 포기할 수 없는 열망, 그런 마음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인간들을 향해 칼날을 세웠고, 총을 쏠 준비를 언제나 하게 했다. 아들을 천사로 만들기 위한 아버지의 사탄의 모습은 어쩌면 부모라면 다 갖고 있는 모습이리라. [The Road]에서의 아빠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절박함을 이해 못한 아들의 행동은 철없는 행위라고 볼 수는 없는 것으로 이해되면서도, 아빠에 대한 가슴 아픈 질책으로만 보였다. 아빠의 공격성은 책임감에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아빠들 역시 사회적 공격성을 갖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리라. 다만 아빠에 대한 아들의 몰이해와 비판은 영화의 비극성을 더욱 높이고 있었다.   

  현실과 꿈이란 이중적 서사 구조는 이상향이 되어 버린 멸망 이전의 과거와, 끔찍한 상황만 전개되는 현실을 대비한다. 그 속에서의 불안하고 희망 없는 미래의 비극성은 더욱 높아만 간다. 또한 아빠의 불행 앞에서, 과연 고난의 끝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바닷가에서의 슬픈 상황 전개는 그래서 괴로웠다. 그런 과정에서 작은 희망의 싹을 봤지만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런 희망찬 결론은 결코 영화 구성상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나마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최악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아름다움 결말처리라는 것을 잘 안다. 어쩌면 영화 [판의 미로]의 마지막과도 같다. 죽고 나서야 환상과 희망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기막힌 역설처럼 영화는 아들의 불안한 미래를 위로하듯 비논리적인 구성으로 마무리한다. 어쩌면 영화감독에게 감사해야 할 끝이었다. 그래서 그냥 위로 정로로만 보인다. 그러나 그런 위로와 위안이라도 받고 싶다. 영화를 만든 자들의 염원이 현실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사실 나 역시 공유하고 싶다. 기약 없는 희망, 그것이라도 있다면 문명 이후의 세상은 그나마 행복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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